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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음
신아연 2008년 01월 15일 (화) 01:46:51
지인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지난해 말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몇 분에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분이 그런 소식을 어떻게 그리 담담하게 전할 수 있느냐며 듣는 사람이 되레 당황스럽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저를 어떤 일 앞에서도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로 인식해서 한 말은 물론 아닌 줄 압니다. 이런 일에는 그렇게까지 침착하고 냉정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보다는 어쩌면 부친상을 당하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냉혈한으로 저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구랍 23일 밤 11시 30분 무렵 , 서울에서 호주 제 집으로 걸려온 큰언니의 전화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이 말 끝에 “연락할 곳이 많아서 그만 끊는다” 가 다였습니다.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두 방망이질을 하는 가슴을 진정시키자니 생뚱맞게도 ‘매번 왜 이래야 하는가’ , ‘도대체 몇 번을 더 이래야 하는가’싶은 생각에 속이 홧홧거리며 약까지 올랐습니다.

뭐가 매번이며 몇번이냐구요?

내 나라 밖에 나와 사는 사람들은 서로 말은 안 해도 각오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는 부모나 가족들의 부음을 느닷없이 접하게 될 것이라는 선연한 사실을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온한 일상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짧게 스침과 동시에 진공 상태처럼 세상이 정지된 느낌에 뒤이어, 꿈인 듯 망연한 일련의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각오입니다.

그것은 마치 무방비 상태로 폭력에 노출되는 무력감이나 상황을 수습할 수 없을 때의 허탈감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외국에 사는 사람들은 한밤 중에 예정에 없던 전화가 걸려오면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친정붙이는 하나도 없이 호주에서 16년을 살고 있습니다. 7년 전에는 암을 앓던 오빠가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식을 오롯이 혼자서 들어야 했습니다. 그 때도 언니는 전화선을 통해 “오빠가 오늘 아침에 갔다”고 군더더기 없이 말했습니다.

그 순간 현실은 뒷걸음질치면서 까마득히 물러나 마치 하나의 점 속으로 함몰되어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먼 이국에서 가족들의 부음을 접하는 순간은 매번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앞으로 몇 번 더 겪어야 할 텐데도 그 때마다 아무 대응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형제를 먼저 보내본 사람들은 압니다. 부모가 떠나는 것은 순리로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를 풀고 나면 다른 문제는 상대적으로 해결하기가 쉬운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할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남의 눈에 제가 그리 담담해 보였던 것을 형제를 먼저 보내 보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치매가 시작되던 4년 전에 이미 아버지를 놓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받지 못한 사랑이 원망으로 엮였던 그 팽팽한 끈이, 언젠가는 한번 따져보리라 벼르던 그 긴장이 당신의 치매로 허망하게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마치 치열하게 겨루던 줄다리기 중에 한 쪽이 맥없이 줄을 놓아버린 것처럼 일방적으로 상황이 종료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반칙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른바 양심수로 20년 20일을 복역하셨습니다.

제가 5살 때 징역살이를 시작해서 26살 되던 해에 가석방되셨으니 아버지가 제게 물려준 것은 오랜 동안 지속된 퍼런 서슬의 연좌제와 대학시절 수시로 따라다니며 감시하던 사복 형사가 기억될 뿐입니다.

어머니가 항상 제게 고마워하시는, 20년 간 아버지께 보내드린 편지 속의 수많은 활자 중 어느 것 한 자도 가석방 이후, 빛바랜 봉함엽서를 빠져나와 부녀 간의 정 으로 살아 움직이지는 못했습니다.

자칭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인류를 사랑하느라 가족의 희생은 당연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기어코 자식까지 하나 앞세운 채 그렇게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과 자기연민도 아버지의 부음에 냉랭했던 진짜 이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 속 진짜 이유는 같은 고통 속에 껴안을 수 있는 가족들 하나 없이 혼자서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빠를 보낸 후 그 힘겹고 외로운 슬픔의 시간을 다시금 혼자 겪는다는 건 너무 끔찍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국 생활 중에 가까운 이의 부음을 접하면 가족들과 함께 있기 위해 우선 급하게 비행기를 탑니다. 그 속에 있기 전까지는 감정의 빗장을 열지 않습니다.

미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저는 뒤미처 이번 달 말에 한국에 갑니다. 그 때는 혼자가 아니니 감정이 북받친다면 그대로 무너져 볼 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에게 ‘애도 집행 유예 기간’을 선언했습니다.

신 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블로그 http://biog.naver.com/ayoun63 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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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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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영 (222.XXX.XXX.36)
매제를 이년전에 하늘나라에보내고, 아버님은 17년전에 여의고 비통해 젖어있던 제 모습을 떠올려 보게 되었습니다. 아연씨의 사연이 절절하게 제 가슴에 전달되는 것 또한 먼저 체험했기 때문일까요?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전에 애도를 표합니다. 아연씨도 평안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노인복지시설 에덴원에서 진 경영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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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5 11: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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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218.XXX.XXX.222)
어려운 상황속에서 잘 성장하셔군요.
아연께서 쓰신 글을 외국에 나가 계신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외국에 대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심이 있었지요. 정말 성장과정에서 고생이 많았다는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아연씨 생각하면서, 저는 지역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해남에서 박종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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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5 10:2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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