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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인문학적 전통을 찾아서
정달호 2018년 03월 07일 (수) 00:04:12

먼저번 고향에 관한 글에서 저는 하회마을을 비롯한 안동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고향이라기보다는 아버님의 고향인 영양(英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안동에서 영양을 거쳐 영덕(盈德)으로 들어가는데 영덕군 영해(寧海)읍은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소싯적에 부모님의 고향인 영양, 영덕을 많이 드나들어 안동 못지않게 추억이 쌓인 곳들입니다. 영양에서는 냇가에서 물고기 잡던 추억이, 그리고 영해 외갓집에서는 바닷가의 추억과 동네 배밭에서 놀던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아버님의 고향인 영양에는 인문학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난 2월 초에 영양군에서는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선생 선양 학술대회'가 있었는데 정영방 선생은 저의 13대 선조로서 16세기 후반에 태어나 17세기 중엽까지 학자 겸 문인으로서 활동하시던 분입니다. 이분은 29세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고도 진작부터 벼슬길에 나가지 않기로 작심하고 향리에서 학문을 닦고 시문을 지으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 전념하였습니다. 석문 선생의 문집이 방대하지만 여태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다가 후손들의 노력으로 이번에 문화재청과 영양군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번역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선양하기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전국 유림을 비롯한 경향 각지에서 7백여 명이 참석하여 기대 이상의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저도 선조의 인물과 업적을 더 알고자 하는 한편 영양에 가는 김에 영양 지역의 인문학적 자취를 더 찾아보고 싶은 마음에서 기꺼이 참가하였습니다. 대회 장소인 영양군 문화체육센터로서는 10여 년 전 설립된 이래 가장 많은 손님을 맞이하였다고 할 정도였으니 조용한 시골 마을이 인문학의 재발견으로 융성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대부 문중을 중심으로 한 학술과 시문 창작 활동이 많았기에 선인들의 문집도 많고 집안마다 조상들의 업적에 대한 자랑거리도 많을 것이지만 이번 행사는 영양에서 활동한 특정 인물에 대한 학술대회를 통해 그의 업적을 선양함으로써 우리 인문학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석문 선생은 학문과 시문뿐 아니라 원림(園林)에도 조예가 깊어 그가 만든 서석지(瑞石池)는 심미적, 철학적 가치가 뛰어나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민가정원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아버님의 고향이라 여러 번 가서 보았지만 이번에 서석지에 관한 연구 발표를 듣고 다시 가보니 과연 특별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석지는 중앙에 있는 연꽃을 중심으로 상운석(祥雲石) 등 물 위에 나타난 돌이 60여 개, 침수된 돌이 30여 개 등 90여 개의 서석군이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면서 전통 정원의 오묘한 정취를 느끼게 해줍니다. 돌마다 각기 특성을 찾아 성리학에 기반한 시적인 이름을 지어 돌을 관조하면서 우주적 사유와 함께 시정을 느낄 수 있게 설계했다고 합니다.

연못의 정면과 측면에 서 있는 경정(敬亭), 주일재(主一齋), 서하헌(棲霞軒) 등 단아한 건물들의 배치도 성리학적 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는데 그 한 기둥에 씌어 있는 주련 중 서석지를 노래한 그의 싯귀가 귓전에 부서집니다.

荷池 하지
小於一方盂 소어일방우    네모난 소반 같은 작은 못 하나
涵盡秋天碧 함진추천벽    가을 하늘 푸르름 다 담고 있네
中有十丈花 중유십장화    그 가운데 연꽃이 피어 있으나
芳香人不識 방향인불식    아름다운 향기 남들은 알지 못하네

영양은 이번 학술대회가 아니더라도 시인 조지훈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 주실마을과 작가 이문열의 고향으로서 조선시대부터 문풍(文風)이 두드러진 두들마을 등이 있어 찾는 사람이 많은 곳입니다. 주실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왼편에 나지막한 산이 주욱 이어져 있어 편안하면서도 그 맞은편 동네에 다소곳이 들어서 있는 한옥들과 한결같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마을 전체가 기품 있는 선비의 풍모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실제로 주실마을에서는 입향조(入鄕祖)인 호은(壺隱) 조전(趙佺) 이래 380여 년 동안 문집과 유고를 남긴 이가 63명이나 되며 근래 들어서도 박사 14명을 비롯하여 대학교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마을의 종택을 마주하는 삼각형 모양의 문필봉(文筆峰)이 인물 배출의 진원지라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봉우리 이름치고는 매우 선비적인 작명이라 하겠습니다.

민족적 기개와 지조를 이어온 주실마을은 일찍 개화한 마을이면서도 일제강점기의 서슬 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전통을 이어받은 때문인지 조지훈은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거나 국어교과서 편찬원으로도 활동하는 한편 한국문학사의 주류 시인으로서 민족어의 보석으로 평가될 명시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지훈문학관에 들어서자마자 조용한 음향으로 흘러나오는 '승무(僧舞)'는 몇 번 연속해서 듣거나 읽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고교 시절에 처음 접한 감흥이 지금껏 남아 있어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앞부분만 발췌해 올립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이하 생략)

주실마을에 이어 찾은 곳은 두들마을입니다. 두들마을은 재령(載寧) 이씨 집성촌으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생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면서 마을을 일구고 그 자손들이 선업을 이어온 문풍(文風)이 높은 마을입니다. 선조의 학풍과 기개를 이어받은 많은 훌륭한 학자들과 의병대장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마을이기도 합니다. 주변에 깊은 산세를 갖추고 있으며 그 아래 펼쳐진, 크지 않지만 위엄 있는 고택들 가운데를 지나다 보면 의연한 조선 선비의 기상이 느껴집니다.

근래 들어 이 마을이 더욱 각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여중군자(女中君子)로 알려진 정부인(貞夫人) 장계향(張桂香)이 써서 남긴 '음식디미방'과 그의 자녀교육에 관한 덕행 때문일 것입니다. 음식디미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로 기록된 음식 조리서로서 조선 중기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일상적으로 만들어 먹는 음식의 재료와 조리법, 보관법 등을 상세하게 서술한 귀중한 문헌입니다. 장계향이 일흔에 집필하였으며 책 뒷면에 이 책을 잘 보관하라는 당부의 말을 쓰면서 첫머리에 "이리 눈이 어두운데 . . . "라고 한 것으로 보아 후손들을 위해 침침한 눈으로 평생의 경험을 되살려 조리서를 쓴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안방을 지켜온 여성이자 어머니로서 후세에 두고두고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여 친밀감과 존경심이 느껴집니다. 마을에는 그의 강인함과 온유함을 갖춘 도덕적 품성과 삶의 지혜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장계향예절관과 유물전시관이 건립돼 있습니다.

두들마을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이문열의 자취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설가의 하나인 이문열의 생가(生家)가 있고, 그의 문학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위한 문학연구소인 광산문우(匡山文宇)가 건립돼 있습니다. 두들마을 자체가 소설의 직접적인 배경으로서, 많은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던 무대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문학강연과 문학토론회 등이 개최되어 작가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영양고추로 유명한 영양이 이렇듯 인문학이 융성하였던 곳인 줄을 몰랐었고 알게 된 후에도 진작에 가보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이번 영양 방문은 안동에 이어 고향 마을의 또다른 인문학적 전통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아버님의 고향이 곧 저 자신의 고향임을 깨달은 것 또한 이번 여행의 큰 소득이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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