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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만년필의 추억
한만수 2018년 05월 01일 (화) 00:11:27

노래를 잘 못 부르는 분들 대부분 명곡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하지만 필기구에 대한 애착이 많은 편입니다. 요즈음은 특별하게 필기구가 필요 없는 데도 책상 위 연필꽂이에는 열 자루가 넘은 필기구가 꽂혀있습니다. 종류도 다양해서 연필이며 볼펜, 수성펜, 붓펜에 심이 가는 것이나 굵은 것 등이 다양합니다. 책상 서랍 안에도 여러 자루의 만년필과 필기구들이 있습니다.

전화통화를 할 때나, 소설을 쓰다 막힐 때, 혹은 식사 후에 휴식을 취할 때는 손에 잡히는 대로 볼펜이나 붓펜 같은 거로 글씨를 쓰는 것이 취미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 파커만년필로 글씨를 쓸 때가 나름대로는 가장 잘 써지는 것 같습니다.

중학교 친구 중에 삼촌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근무를 하다 월남에 파병 된 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 집에 커다란 나무상자가 화물로 배달 되었습니다. 월남에서 보낸 화물이 왔다는 소문에 이웃 사람들이며 몇몇 친구들은 구경을 갔습니다. 친구 아버지가 빠루라고 부르는 노루발못뽑이로 나무상자를 해체했습니다.

상자 안에서는 그 당시 구경하기 힘든 15인치 흑백텔레비전에, 야외전축이며, 양주에 C-레이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농촌인심이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친구 부모님들은 구경 온 이웃들이며 우리들에게 귀한 C-레이션을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걸 집으로 들고 와서 자랑스럽게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C-레이션 상자 뚜껑을 여니까 껌이며, 초콜릿, 담배, 치즈, 쇠고기통조림 같은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껌하고 초콜릿 빼고는 너무 느끼해서 모두 입맛만 보고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 그 나무상자는 월남파병군인이 귀국하기 전에 고향으로 보내는 ‘귀국박스’ 였습니다. 친구의 삼촌은 그나마 장교라서 사정이 좋아 텔레비전이며 야외전축에 양주 같은 것을 보냈습니다. 일반 사병들은 밤새 총알 탄피를 망치로 두들겨 납작하게 만든 것이나, 전선의 고무피목을 벗겨낸 구리철사를 가득 모아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 시절만 해도 구릿값이 비싸던 때라 구리를 팔아서 살림밑천을 할 정도는 됐다고 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튿날 한문 시간이었습니다. 한문선생님의 별명은 ‘들어가’ 였습니다. 떠들거나, 졸거나,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은 일단 교탁 앞으로 불러냅니다. 훈계하신 다음에 “들어가” 라고 하셔놓고 학생이 제자리로 가는 동안 뒤를 따라가면서 회초리로 어깨며 등짝을 마구 두들기는 무서운 선생님이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펜글씨를 습관화해야 나중에 글씨를 잘 쓸 수 있으시다며 한문수업시간에는 무조건 펜글씨를 고집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초등학생은 연필로 노트를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 ‘모나미 볼펜’을 사용했습니다. 모나미나, 파이로트 볼펜으로 필기를 하면 자유자재로 쓸 수 있고, 때로는 만화 같은 것도 쉽게 그릴 수 있지만 펜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파이로트 잉크를 책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뚜껑이 열리기라도 하면 가방은 물론이고 책에 잉크가 번지기 일쑵니다. 책상에 올려놓고도 조심하지 않고 무의식중에 팔로 밀어내는 사고라도 나면 책은 물론 교복도 잉크 범벅이 됩니다. 하복 같은 경우는 잘 지워지지 않아서 몇 날 며칠이나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기도 합니다.

삼촌이 월남 간 친구가 파커만년필을 들고 왔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미제라면 똥도 먹을 수 있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미국제품이라면 무조건 최고로 쳤습니다. 파커만년필은 국산 파이로트 만년필보다 훨씬 견고해 보였고, 펜촉도 황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나 보였습니다.

그 친구의 파커만년필 자랑은 5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들어가 선생님의 눈에 발각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만년필 압수에, 자기 책상 앞으로 가는 사이에 어깨를 10여 대를 난타당하는 고통도 덤으로 받았습니다. 한문 수업시간이 끝나도 선생님은 만년필을 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친구는 너무 무서워서 만년필을 달라는 말은 못하고 한없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복도를 걸어가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파커만년필의 황홀한 풍채에 혼을 빼앗겼던 제가 친구에게 제안했습니다. “내가 선생님께 사정을 하고 만년필을 찾아오겠다. 그 대신 하룻밤만 나에게 빌려줘라.” 친구는 망설이지도 않고 승낙을 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서 교무실로 찾아갔습니다. 한문선생님은 깜박 잊고 돌려주지 않으셨다며 별다른 이유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너무 고마워서 인사를 몇 번씩이나 하고 교무실을 나왔습니다.

여름날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축구를 하거나,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혹은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집에 일찍 가봐야 옷을 갈아입고 논밭으로 가야 하거나, 쇠꼴을 베어야 하는 등 농사일을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실에 앉아서 흥분한 얼굴로 파커만년필을 꺼내 들었습니다. 손가락에 와 닿는 묵직한 감촉이 손가락에 찰싹 달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노트를 펼치고 이름 석 자를 써봤습니다. 학교명도 쓰고, 친구들 이름, 유행가 가사 한 토막, 생각나는 대로 글씨를 썼습니다. 미제는 역시 다르다는 확신이 들어서 그런지 글씨도 더 잘 써지는 것 같고, 잉크도 번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파커만년필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은 그날 밤늦게까지 이어졌습니다. 국어책에 나오는 민태원의 ‘청춘예찬(靑春禮讚)을 필사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파커만년필과의 인연은 은행원으로 근무를 하던 시절로 이어졌습니다. 007가방이라 부르는 검은색 가방에 미제물품을 파는 분이 객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손전등이며 화장품, 나이프, 라이터 같은 물품 안에 파커만년필도 있었습니다. 펜촉이 18k라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구입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파커만년필과의 인연은 하룻밤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퇴근 후에 동료들과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파커만년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꽤 많은 돈을 주고 구입을 했던 터라 며칠 동안 아쉬워했습니다.

세월이 또 흘러서 골목 안에 있는 한 평 크기의 작은 가게서 수입물품을 파는 곳에 들렀습니다. 그냥 구경만 하려고 들렀다가 파커만년필이 보여서 얼른 구입을 했습니다. 그 파커만년필과의 인연은 10년 이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컴퓨터로 소설을 쓰지만,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는 2벌식 타자기를 사용했습니다. 타자로 치기 전에 파커만년필로 대학노트에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그것을 보고 타자를 쳐서 여러 부 복사하여 모임에 들고 가 합평을 했었습니다.

컴퓨터로 글을 쓰면 여러 가지로 편리합니다. 일단 최소한 2백자 원고지 1매 이상의 분량을 실시간으로 읽으며 글을 쓸 수 있어서 문맥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틀린 부분은 즉시 삭제를 하거나 수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안 좋은 점은 글을 쓰는 데 정성이 들어갔는지 대충 썼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컴퓨터가 보편화되어도 외국에서는 부모님이나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손글씨로 쓴 편지를 주고받는 문화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도 캘리그라피라고 해서 손글씨로 음식점의 메뉴를 쓰거나, 간단한 광고문안 같은 것을 쓰는 것이 유행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손글씨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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