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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 500주년, 충암 김정(金淨)을 생각하다
정달호 2019년 03월 22일 (금) 00:21:17

3·1 독립운동 100주년, 임정수립 100주년 등은 파급력이 매우 큰 역사적인 사건들이므로 올해가 각각 그 100주년이란 사실이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에 걸맞게 국가적인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음악가, 대문호 등 예술가나 사상가, 과학자들이 탄생 또는 서거한 해로부터 100주년 또는 200주년을 기리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분들이 남긴 업적이 우리의 삶에 여전히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기묘사화(己卯士禍)라는 우리 역사의 특정 사건을 놓고 500주년 운운하는 것은 다소 의외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이라면 모를까, 기묘사화가 500년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기묘사화 500주년을 부각시키게 된 동기는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 사화(士禍)의 한 주역인 김정(金淨, 1486~1521)의 17대 종손이 저의 고교동창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전시립박물관에서 [1519 선비의 화 - 김정과 그의 조선] 제목으로 기묘사화 500주년 충암특별기획전(2018.12.7~3.31)이 개최되고 있음도 그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대전의 한 박물관이 대전, 충청 권역의 역사적인 인물 탐구의 일환으로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분인 충암공(沖庵公) 김정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2천여 점에 이르는 그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익히 알고 있듯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필두로 하는 기묘명현은 당시 희생되었던 분들이 복권되고 나서 한참 후에 그리 불리게 되었다 하니 그분들의 죽음이 역사적,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죽음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충암공은 제가 살고 있는 제주와도 관련이 적지 않습니다. 1519년 기묘년에 금산(錦山)으로 유배되어 중간에 진도로 옮겼다가 이듬해 더 힘든 곳인 제주로 왔던 김정은 얼마 후 훈구파의 끈질긴 모략으로 결국 사약을 받습니다. 유배된 지 2년 만인 1521년,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김정 서거 당시 제주인들은 그의 배소(配所) 자리에 귤림서원(橘林書院)을 세워 그의 선비적 기상(氣像)과 학문적.교육적 업적을 기리게 됩니다. 김정은 그후 24년 만인 1545년에 복권이 되지요. 이후 귤림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장소에 다른 네 분, 즉 동계(桐溪) 정온, 청음(淸陰) 김상헌, 규암(圭庵) 송인수, 우암(尤庵) 송시열을 함께 모시면서 오현단(五賢壇)으로 불리게 됩니다. 다섯 분 중 규암과 청음 두 분은 각기 목사(牧使), 안무사(按撫使)로서 제주에 오신 분들이고 나머지 세 분은 유배 왔다가 현지에서 학문적.교육적 영향을 주었기에 그처럼 숭앙을 받게 된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오현단의 이름을 딴 오현고등학교가 그 자리에 들어섰으며 오늘날까지 매년 오현고등학교(지금은 부근으로 이전) 주관으로 오현단에서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습니다.

폭군을 폐위시키고 새 왕을 옹립한 초유의 쿠데타 사건인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그 공신세력이 조광조를 필두로 한 개혁파 사림(士林)세력을 몰아낸 것이 기묘사화(1519년)입니다. 이때 함께 화(禍)를 입은 김정은 비교적 덜 알려져 왔지만, 30세 때인 순창 군수 시절에 이미 “조강지처는 임금이라도 내버릴 수 없다”는 인륜의 근본 원칙을 당당히 내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를 포함한 2인이 인륜 대원칙에 따라 중종의 페비 신씨(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의 주인공)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조정 내에 큰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에는 신씨 폐위를 주도했던 훈구파 세력의 미움을 산 끝에 아홉 달의 귀양살이를 한 바 있습니다. 이 상소건만 보아도 그의 올곧은 성품을 알 수 있으며 옳은 일을 놓고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장섰던 그의 기개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선비로서 의기투합한 지기(知己) 조광조의 권유로 다시 벼슬길에 들어 형조판서까지 오르면서 개혁정치의 주도세력으로 참여하다가 결국 화를 입은 것입니다. 

충암은 어릴 때부터 이미 신동으로 불릴 만큼 학문과 시문에 능했다고 합니다. 그의 천재성에 대해서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6세 때 부친이 시를 짓도록 운(韻)을 내주었는데 마당에 핀 목단을 보고 그 자리에서 ‘목단’이란 시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합니다.

洛陽多甲第 낙양엔 뛰어난 집안이 많은데
姚魏鬪芳菲 요씨와 위씨가 미색을 다투었지 
色借楊妃貌 미색은 양귀비의 모습을 빌려온 듯하고 
香分韓壽衣 향취는 한수의 옷 향기를 나눈 듯하구나!
翠凝煙乍暖 비취 제(크림)가 엉기니 안개가 막 데워진 듯하고 
紅潤露初稀 붉은 분이 윤기 나니 이슬이 막 마른 듯하구나! 
莫倚春長在 언제까지나 봄일 거라고 믿지를 마라! 
明朝事已非 내일 아침이면 벌써 처지가 달라지리니 

충암의 아버지는 여섯 살 아이가 지은 한시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으나 시의 마지막 절이 끝나고서는 “구법(句法)이 맑고 신선하여 빼어나지만 애절한 바 있으니, 장차 이 아이가 제 뜻을 펴보지 못하고 수를 누리지도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 가문을 창대하게 하고 죽어서 이름을 남길 자는 틀림없이 이 아이일 것이다” 라고 혼잣말을 하였다 합니다.

충암은 1576년(선조9년)에 임금으로부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이는 학문이 넓고 남의 말을 경청한다는 의미의 문(文)과, 몸가짐이 정중하고 남을 대하는 태도가 대범하고 관대하다는 의미의 간(簡)을 합친 말이라고 합니다. 그 후 1790년(정조 14년)에는 임금으로부터 불천위(不遷位) 윤허를 받았습니다. 문간공 시호가 내려진 후 270여 년 간 사림으로부터의 끈질긴 상소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로 보입니다. 선조 할아버지가 불천위 윤허를 받아야 그 집안이 진정한 종가(宗家)로 일어나고 그 직계 장손은 진정한 종손으로 불리게 된다고 합니다. 불천위 선조의 종손은 그 명예와 지위를 누리는 것보다 그에 걸맞은 책임을 다하는 일이 더 크다고 합니다. 오늘날 나라에 상당수의 종가가 남아 있어, 비록 모두는 아닐지라도 조상을 공경함으로써 주변에 효의 귀감이 되는 한편, 가문의 명예에 상응하는 사회적 역할을 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당시 사림의 개혁정치에 이론을 제공한 성리학(性理學)이 조선의 정치와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며 필자로서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반복된 기득권과 신진세력 간 극단적인 알력이 조선의 정치를 세도정치로 타락시키는 한편 민심을 이반시키고 사회를 피폐하게 하여 종내는 나라의 역량과 품격을 떨어트린 것이니 후인들은 이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갑자사화, 무오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커다란 사화가 잇달아 일어나 피가 피를 부른, 부끄럽고 어두운 역사에 비춰볼 때 조선의 지도자들은 국리민복, 국태민안의 정치를 펼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의 무능과 사회의 피폐가 결국에 가서는 잇단 외적의 난에 대한 무방비 상황을 야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번 대전시립박물관의 [1519 선비의 화 - 김정과 그의 조선] 전(展)은 개혁정치를 실현해 보지 못하고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찍이 세상을 떠난 당대의 빼어난 정치가들을 조명할 뿐 아니라 조선 역사의 어둡고 비열한 면을 상기시키고 있어 현금의 정치인들(Political Class)과 사회지도층이 이를 깊이 성찰하여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적폐청산(積弊淸算)’이란 말도 사화에 휘말려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정치사의 한 단면을 떠올리게 하는 바 있어 예나 다름없이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1)인왕산 치마바위
신씨는 폐출되면서 친정집으로 옮겨 구차한 몸을 의탁했는데 지금의 인왕산 중턱이었다. 중종은 새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 9남 11녀를 낳고 살면서도 조강지처를 못 잊어 했다. 신씨는 중종이 저녁노을이 질 때면 인왕산 쪽을 바라보면서 슬픔에 잠긴다는 말을 전해 듣고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인왕산 큰 바위에 자신의 다홍치마를 걸어 놓았다. 임금과 폐비는 치마바위를 함께 보며 하염없이 눈물지었다고 한다.

*** (2)불천위(不遷位)
일반적으로 사대부(士大夫) 집에서는 돌아가신 4대 조상까지는 사당(祠堂)에 위패 (位牌, 神柱)를 모시고 돌아가신 날에 방안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를 기제사(忌祭祀) 또는 방안 제사라고 한다. 5대 이상의 조상에 대해서는 신위(神位)를 사당에서 묘소 앞으로 옮겨(遷位) 땅에 묻고 그 후로는 돌아가신 날이 아닌 정해진 날에 묘제(墓祭)로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이를 시향(時享), 시제(時祭), 또는 세일사(歲一祀)라 부른다. 그런데 불천위를 받으면 4대가 넘어도 신위를 묘소 앞으로 옮기지 아니하고, 후손이 끊어질 때까지 사당에 모시고 돌아가신 날에 영원히 방안 제사로 받들게 된다.

*** (3)경주 김씨 충암공파
경주 김씨 충암공파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은열(殷烈)의 후손으로서 충북 보은에 정착한 충암 김정을 파(派) 시조로 하며 현재의 종손은 17대손인 김응일(金應一)이다. 그는 종부인 아내와 함께 대전 시내에서 부부 약국을 경영하면서 종가를 지켜오고 있는데 한 해에 조상 제사를 24회 모신다고 한다. 종손과 종부는 현대인 같지 않게 종가의 힘든 일에 불평 없이 몰두하여 주변과 지역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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