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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서울 구경
한만수 2019년 07월 15일 (월) 00:07:39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작은 설날에 서울에서 혼자 살고 계시는 작은당숙이 저녁 시간이 지난 뒤에 갑자기 들어오셨습니다. 작은당숙은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대학생이셨습니다. 큰당숙은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작은당숙은 가정교사로 학비를 버시며 대학교에 다니시는 분이라서 어린 제 눈에는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어머님이 저녁 밥상을 차리려고 하시니까 작은 당숙이 간단하게 라면이나 끓여달라고 하셨습니다. 작은당숙 곁을 지키고 있던 저는 ‘라면’이라는 말에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어머님도 라면은 처음 듣는 말이라는 표정으로 대학생들만 특별하게 먹는 음식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숙은 웃으시면서 버스표를 파는 삼거리 차부상회에 가서 라면을 달라고 하면 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숙이 내미는 십 원짜리를 들고 달려가서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마른국수처럼 보이는 라면을 사 왔습니다.

라면을 사서 집에 와 보니 냄비의 물이 펄펄 끓고 있었습니다. 작은당숙은 어머님께 라면 끓이는 법을 알려주시겠다며 직접 끓였습니다. 어머님과 저는 당숙이 냄비 뚜껑에 덜어주신 라면을 한 젓가락씩 맛을 봤습니다. 돼지고기를 끓인 국물에 국수를 넣어 끓인 것 같은 묘한 맛의 여운이 군침을 계속 삼키게 만들었습니다. 라면이 너무 맛있어서 서울 사는 사람들은 매일 라면을 먹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쁠 때나 밥을 하기 싫은 날이나 끓여 먹는다고 하시는 말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큰당숙은 이농현상이 막 시작되는 무렵 60년대 초반에 서울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솥단지에 이불이며 괴나리봇짐을 싸 들고 올라가셨는데도 명절 때는 꼭 내려오셨습니다. 정종병이며, 고깃근을 끊어서 들고 오시는 당숙의 표정이며 옷차림은 산골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때와 확연히 다르게 당당해 보였습니다.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사실 때는 아버님이 대화를 주도하셨는데 서울로 이사를 가신 후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아버님은 묵묵히 술만 드시는 편이시고, 당숙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물정에 대해서 밤이 이슥해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방학 다음 날이 되면 육촌동생 형제들이 어김없이 내려왔습니다. 한 살 터울인 육촌동생들과 여름방학이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다가 밤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웠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서울에도 하루 세끼 보리밥만 먹고 사는 집이 있느냐, 놀 때는 어디서 노느냐? 창경원이며 남산공원 같은 데는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거냐? 라는 등 주로 제가 질문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깃불이 사위어 갈 무렵이면 어머님이 이불을 내오시거나,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해 겨울방학에는 육촌동생들이 스케이트를 사 들고 내려왔습니다. 육촌동생들의 스케이트는 작은 면소재지 동네에 금방 소문이 났습니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피부도 뽀얗고 말투도 다릅니다. 그런 데다 스케이트까지 있으니까 아이들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육촌형제들을 대했습니다.

저는 육촌형제들의 일가(一家)로서 스케이트를 배우는 특권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 시절에는 사촌이니, 육촌이니 하는 촌(寸)수로 친척을 따지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멀고 가까움을 떠나서 일가(一家)라는 말을 주로 썼습니다.

진외가(陳外家)는 할머니 친정입니다. 할머니의 친정이니까 요즘 같으면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아버님이 자주 진외가를 거론하셔서 매우 가까운 일가인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저를 아저씨라 부르는 동창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5촌 누님의 손자니까 촌수로 따지면 7촌이나 8촌쯤 될 겁니다. 그분의 아들이 저하고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부를 때는 꼭 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어쩌다 그 집에 놀러 가서 잠을 잘 때는 동창의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육촌동생에게 스케이트를 배워서 오리걸음으로 달리는 흉내를 낼 정도가 됐습니다. 스케이트를 타고 겨울바람을 가르며 달리면 야릇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쪼그려 앉거나 무릎을 꿇고 앉아 썰매를 타는 아이들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고, 모두가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우쭐한 기분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스케이트에 익숙해질수록 서울에 대한 동경은 더 커졌지만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그 시절 또래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저도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울 구경하고 싶다는 말은 그냥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육촌동생들은 개학을 하루 앞두고 짐을 꾸렸습니다. 서울에서는 스케이트를 탈 일이 별로 없다며 스케이트는 챙기지 않았습니다. 칼날을 구두에 붙이는 볼트 몇 개가 빠져나간 스케이트는 방학 때 얼마나 탔는지 거의 고물이 다 됐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친구들하고 실컷 스케이트를 타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습니다.

방학이 끝나고도 추위가 이어졌습니다. 그래도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습니다. 고물이 된 스케이트를 바라보면 육촌동생들과 재미있게 스케이트를 타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육촌동생들이 없어서 그런지 혼자서는 스케이트를 타고 싶지 않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당숙네 집에 놀러 갔습니다. 서울에 대한 동경과 환상은 천호동에 살고 계시는 당숙네 집에 도착하는 순간 여지없이 깨져 버렸습니다. 가게를 내서 장사를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던 당숙과 당숙모는 왕십리 도매시장에서 리어카로 채소를 떼어 와서 파는 것이 생업이었습니다.

서울에서의 며칠은 주인집 마당을 지나쳐야 들어갈 수 있는 방 두 칸짜리 전세방에서 놀다가 만화책을 보거나, 고향의 읍내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동네 골목을 하릴없이 돌아다녔습니다. 하루는 육촌동생들이 골프장에 골프공을 주우러 가자고 했습니다. 광나루 다리를 지나서 지금의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던 컨트리클럽까지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갔다 온 것이 서울 구경의 전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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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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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빈 (58.XXX.XXX.226)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골 출신으로서 중학생이 되어서야 서울 구경을 처음 했었는데 미아리(여기는 예나 지금이나 미아동이 아니고 미아리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습니다.) 고모내 집이었습니다.
고단한 서울 삶, 비좁은 방 칸에서 오물오물 살던 그 때의 모습이란.....
지금 생각하니 정겹지만 그 때는 서울이라는 데가 썩 정겹지 않고 답답했었습니다.

※ 5촌 누님이라는 촌수는 없습니다. 4촌 혹은 6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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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08: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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