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고영회 산소리
     
'장롱 특허'를 보는 눈
고영회 2019년 10월 29일 (화) 00:12:46

지난 10월 23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서 제출받은 ‘소재·부품·장비 분야 출연연 핵심기술 중 미활용 특허 현황’에 따르면, 출연연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 핵심 특허는 444건이며 이중 기업에 이전된 기술 특허는 83건으로 19%에 지나지 않아 미활용 특허는 361건으로 81%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사 제목도 “출연연 소부장 특허 444건…81%가 장롱특허”였습니다.

예전에 기술자격(특히 기술사)을 받았지만, 다른 전문 자격증과 비교할 때 쓸모가 없어 장롱이나 서랍 속에 넣어두고 활용할 일이 없다는 뜻에서 ‘장롱 자격’이라 불렀습니다. 이번에는 특허를 받았지만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특허기술을 ‘장롱특허’라 부르는 듯합니다. 사장되어 있는 특허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이어서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특허에서 장롱 특허라는 말이 적절한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허는 신규성(세계 처음)과 진보성(기존 기술에 비해 한 단계 발전한 것)을 갖추고, 같은 기술이면 먼저 권리를 신청한 사람에게 특허권을 줍니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온 세계에서 거의 공통된 요건입니다.

새롭게 개발한 기술이 진일보한 것으로 인정된 것에 진보성을 인정할 때 특허를 줍니다. 특허에서 진보성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인정될 수 있습니다. 기술력은 시장 경쟁력(생산 원가) 뿐만 아니라 그밖에 많은 요인에서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특허를 받았더라도 그 기술로 만든 제품이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는 기술이라면 사업화하기 어렵습니다. 콘크리트 배합설계를 보기로 들면, 콘크리트 기술에는 생산 원가도 작용하지만, 시베리아와 같은 혹한에서 타설할 수 있는가, 초기 강도가 얼마나 빨리 발현될 수 있는가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주 추운 곳에서 보통 방식으로 타설할 수 있으면 비록 생산 원가가 훨씬 많이 들어가더라도 특허를 받을 수 있지만, 시장 상품으로 나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이 맞을 때까지 그 기술은 때를 기다리며 장롱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 특허기간이 다 지나도록 써먹지 못하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새 콘크리트 기술을 불필요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특허 기술을 시장성이 없다거나 사업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질책하면 정책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현재 실시율(시장제품화 비율)이 19%인데 연도별로 목표를 정해 실시율을 올리려는 쪽으로 정책 목표를 바꾸면 곧 재앙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검증된 수치는 아니지만, 연구개발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려고 도전했을 때 개발 성공 가능성은 30% 이하(그런데도 우리 연구개발 성공률은 거의 100%에 가까운가 봅니다)이고, 개발한 기술이 특허를 받을 가능성은 67% 안팎이고, 특허를 받은 기술을 활용한 제품을 시장에 내는 확률은 10%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실시율 19%가 낮다고 장롱특허라고 질책하는 것이라면, 본질을 벗어났습니다.

기술 개발에서는, 연구자가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에서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환경에서라면 소외받는 기술 분야에는 연구개발비도 없고, 연구 인력도 없어서 정작 그 기술이 필요할 때는 우리에게 없다는 현실이 더 위험한 상황이겠습니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에 아직 걸리지 않았는데 그 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살아 있는 돼지를 땅 속에 파묻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저런 병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연구비는 탈 수 있었을까, 연구비를 주었는데도, 재빨리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연구비를 계속 받을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인기도 없고, 연구 환경도 나빴지만 저 열병을 막을 항체 기술이 '장롱 특허'로 있었더라면 정말 요긴하게 썼을 텐데 말이죠.

기술은 우리의 삶을 넉넉하게 만들어 줍니다. 기술은 개발돼 있다는 것으로 이미 유용합니다. 잘못된 제도는 빨리 버려야 사회에 덕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 활용되지 않지만 특허란 이름표를 달고 많이 장롱 속에 쌓여 있으면, 있다는 것으로 제 역할을 한다고 여겨도 되겠습니다. 장롱 특허는 많을수록 좋다, 장롱 특허 많이 쌓아두자, 장롱 특허라 생각했는데 그 속에서 효자 특허가 나올 수 있는 바탕이다고 생각을 바꿔도 좋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2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독자 (112.XXX.XXX.252)
고영회 대표님,
'장롱 특허'를 보는 눈' 잘 읽었습니다.
특허를 받은분들은 자기의 특허가 활용되길 바라며 많은 노력과 시간을 보냈겠지만 대표님의 글을 통해 다른 면도 고려할 점이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이시군요.
도이칠란트 디어도르프에서
강정희 드림
답변달기
2019-10-31 23:48:42
0 0
독자 (112.XXX.XXX.252)
고영희 선생님 보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격하게 공감합니다.
이런 경우가 어디 특허뿐이겠습니까?
기초과학 분야 모두가 다 이런 틀에 묶여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겠지요.
장롱 자동차 면허가 낭비는 아니지요.
장롱 면허를 갖고 있는 사람가 없는 사람 사이엔 큰 차이가 있지요
"아, 난 언젠가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어.
그냥, 지구 환경을 생각해서 운전을 안 하고 있을 뿐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아예 자동차 면허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 사이엔
자동차와 관련된 자기 정체성에 차이가 있을 겁니다.
쓰다 보니까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네요
장롱특허 많아야겠습니다.
답변달기
2019-10-31 23:47:39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