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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行間)
박상도 2019년 11월 26일 (화) 00:19:55

화제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마지막 회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노규태(오정세)와 홍자영(염혜란)의 연애 장면이 방영되었습니다. 노규태가 연상의 홍자영에게 “근데, 누나, 누나 동기 새끼들은 다 판검산데 왜 굳이 나랑 결혼을 해?” 하고 묻자 “난, 너랑 있으면 편해, 넌 사람이 행간이 없잖아.”라고 홍자영이 대답합니다. 노규태는 행간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뉘앙스로 “행간….”을 읊조립니다. 그러자 홍자영이 단호하게 다시 확인해 줍니다 “행간!”

TV리모컨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아내를 따라, <동백꽃 필 무렵>의 시청자 대열에 드라마 중반부터 합류한 필자는 주옥같은 대사에 무릎을 치며 필명을 쓰는 임상춘 작가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함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 주옥같은 대사 중 하나가 바로 “넌 사람이 행간이 없어.”입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거의 정확한 낱말과 정확한 낱말의 차이점은 실제로 엄청나다. 그 차이는 진짜 번갯불과 반딧불만큼 다르다.”라고 말했습니다. 노규태를 일곱 글자로 정확하게 요약하면 ‘행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요즘처럼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사는 세상에 노규태 같은 인물을 드라마에서라도 본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간’이 검색어 1위를 한 것입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밤늦도록 행간이 검색어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아마도 행간의 뜻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때, 네이버 검색창에 행간을 치면, ‘행간(行姦) : 명사. 간음을 행함’이라는 뜻이 가장 먼저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쓰인 행간(行間)은 ‘다른 뜻 보기’를 눌러야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 검색창에 행간을 치고 그 뜻을 찾아보셨던 분들은 어리둥절해 하셨거나 규태에 대해 엉뚱한 상상을 하셨을 겁니다. 다행히 지금은 행간을 검색하면 행간(行間)이 먼저 나오고, 그 풀이는 '1. 쓰거나 인쇄한 글의 줄과 줄 사이. 또는 행과 행 사이 2. 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아니하나 그 글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는 숨은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잘 나와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의 지적을 받고 네이버가 순서를 바로잡은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다 노규태 같아서 행간을 읽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행간을 읽어야만’ 보이는 진실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언행, 그리고 권력을 얻고자 하는 자들의 언행은 행간을 읽어야 거짓과 진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 시스템들이 누구에 의해 또는 어떤 단체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행간을 읽어야 실수가 없이 옳고 그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나쁜 짓을 하려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지 못합니다. 과거에는 훈련된 사람들이 사회현상의 행간을 읽고 이를 알려주었다면, 1인 미디어의 시대인 오늘에는 국민 모두가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행간이 뭔지를 모르고 네이버에서 그 뜻을 찾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모르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됐는지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죗값보다 더 큰 사회적 지탄을 받아야 했고, 흔히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횡행했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혹세무민(惑世誣民)에 몰두하여 사이비 교주처럼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사이비 교주를 따르는 신도들은 교주를 비판하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교주는 자신들이 지켜야 할 절대선(絕對善)이기 때문에 누가 자신들의 교주를 비난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대중의 흐름에 영합하는 것을 넘어 이 흐름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필자가 존경하는 대 선배님을 여러 언론사 선후배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해직기자 출신으로 언론사 사장, 신문협회 회장도 역임하셨던 그분께서, “내가 50년 동안 기자생활을 했지만 요즘처럼 뭐가 옳고 그른지 헛갈린 적이 없습니다. 국민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패가 갈려서 싸운 적이 내 기억에는 없어요. 한 쪽은 지구인의 말을 하고 다른 한 쪽은 화성인의 말을 해요. 그런데 이제는 내 생각을 말을 못 하겠습니다. 이젠 자신이 없어요.”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당신의 생각을 말씀하시는 순간 어느 한 편으로 낙인이 찍히는 세태에 대한 염려가 크셨을 것 같다는 짧은 추측을 해 봅니다. 그 선배님은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여러분이 제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만약에 그럴 수 없을 것 같으면 일기(日記)에라도 써서 그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자식에게라도 여러분의 생각을 알려줘야 합니다.”

매일 낮 12시에 뉴스를 진행하는 필자는 기사를 체크할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 생각을 뉴스를 진행하면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중립을 지켜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건 정말 나쁜 겁니다!”, “이건 너무 과한 마녀사냥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요!”, “이 판국에 제 편만 생각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 같으니라고!” 등등을 수없이 외칩니다. 물론 뉴스를 보시는 분들에게 제 생각이 전달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필자는 그래서 뉴스의 시청자들께서 행간을 읽는 노력을 하셔서 뉴스를 분석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간이 없는 노규태의 꿈은 군수(郡守)입니다. 노규태 같은 인물이 정치를 하면 기자들이 무척 편할 겁니다. 행동한 대로 이해하고, 말한 대로 생각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은 포장을 너무 잘합니다. 그것도 겹겹이 말입니다. 과거에는 그 포장을 선택된 일부 사람들이 친절히 벗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포장들을 국민들이 잘 벗겨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1인 미디어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행간(行間)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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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218.XXX.XXX.200)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장안의 화제 드라마인 <동백꽃 필 무렵>을 한번 시청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종영했군요. 글을 맛깔나게
쓰십니다.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사람 찾기가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쉽게 사랑하게 안됩니다. 저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인데도 불구하고 나라의 소중함을 자주 잊고 삽니다.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눈 크게 뜨고 찾아봐야겠습니다. 건승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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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6 1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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