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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여성의 목소리
기계형 국립여성사전시관 관장 2019년 12월 28일 (토) 00:17:07

올해도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우리 사회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성폭력 가해자들이 법정에 섰고, 여성의 낙태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법관 3인이, 그리고 여군 최초로 별 2개를 단 소장이 탄생했습니다. 물론 여성에 대한 각종 폭력, 공기업의 채용 성차별 문제 등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목소리의 원천을 생각해보셨는지요? 용감하게 외친 여성들의 역사적 계보 말입니다.

저는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역사의 수면 아래 묻혔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국립여성사전시관의 관장으로서 만감이 교차하는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1898년 9월 1일 세상을 향해 여성의 권리를 외쳤던 북촌의 이소사, 김소사처럼 이름이 없는 수많은 ‘소사(召史)’들과 관련됩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주어진 시대의 여건과 상황은 상당히 다르지만,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무모할 정도로 비장하게 외쳐야 했고 쓸쓸하게 잊혔다가 되살아난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많이 닮아 있습니다.

‘소사’(召史)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17세기 초에 소사의 한글 음은 ‘조이(助吏)’ 혹은 ‘조시(助是)’로 읽히기도 하여 여자노비 이름을 지칭하는 호적자료도 등장합니다만, 17~19세기에 성을 붙여 양민여성을 부르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19세기를 지나 개화기에 사용된 용례로 보자면 당시의 신문들은 소사가 ‘쇼ᄉᆞ’로 음독되었음을 확인해주는데요. 소사는 양반가 부녀자를 부르는 씨(氏)와 겨루다가 사라졌고, 현재는 ‘결혼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인 여사(女史)에서 소사의 형태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1898년 9월 1일에 여권통문(女權通文)을 지어 돌린 당찬 여성들 이소사와 김소사에게는 호칭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발간된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1947년)은 “성 아래에 붙여서 ‘홀어미’를 나타내는 말”로 소사의 뜻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과부라는 것이지요. 이 사전의 편찬 작업이 20세기 초부터 진행되었으므로 개화기 당시의 언어상황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사농공상에 기반하는 신분제가 있던 시기에 양반가 여성뿐만 아니라 중인, 양민, 첩실(妾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과 상이한 처지의 여성들이 함께하였습니다. 이소사와 김소사 등과 뜻을 같이하여 모인 3백~4백여 여성들의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호칭의 변천사 운운하며 설명을 늘어놓은 이유는 역사의 중요한 장면에 등장하는 보통 여성들의 이야기는 기록이 희소해 마치 퍼즐을 맞추듯 추적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실제로 1896년 4월에 창간된 독립신문, 그리고 1898년 8월에 창간된 제국신문, 그리고 그해 9월 5일에 창간되었던 황성신문 등은 여성의 권리를 외치고 통문을 돌린 김소사 이소사와 그들의 뜻에 동조하여 모인 여성조직 찬양회(贊襄會)의 여성들을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로 후속 기사로 실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여성의 교육권과 직업권, 그리고 남성과 동권을 지닌 여성이 개명된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아 통문을 지었고, 여아들의 교육은 국가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고종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돈을 모아 열었던 순수 민간 순성여학교는 1903년 초에 문을 닫았습니다. 김소사, 즉 김양현당(金養賢堂)은 순성여학교의 교장으로 고군분투하다가 병을 얻었고, 여아들을 교육하느라 전 재산을 탕진하여 장례를 치러 줄 이 없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신문기사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김소사와 이소사의 이야기는 2세대가 훨씬 지나 박용옥, 윤정란이라는 여성 사학자가 감추어진 역사의 깊은 수면에서 끌어올린 허스토리(herstory)입니다. 그리고 국립여성사전시관은 여권통문 발표 120주년이었던 2018년 8월에 여권통문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하고 그 연구를 바탕으로 특별기획전을 개최하였으며 그 후 기념 표석을 세우기까지 1년여 동안 준비를 하였습니다. 서울시의 표석 설치를 담당하는 서울시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로 자료를 보내 최종심의 결과를 기다리고, 표석 설치 공간을 제공하기로 한 신한금융 측으로부터 최종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애가 탔지요.

마침내 올해 8월 30일에 여권통문 표석 제막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작지만 위대한 여성들, 미소(微小)하지만 빛나는 허스토리의 주역들이 순성여학교와 찬양회 설립을 결의한 장소(현재의 신한은행 백년관)에 여권통문 표석을 세운 것입니다.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을 비롯해 여성계와 문화계의 많은 인사들이 참석한 제막식은 태평소의 힘찬 소리와 함께 여권통문의 의미를 121년 만에 되살리는 축제의 한마당이 되었네요. 이를 통해 역사 속에서 더 많은 김소사와 이소사를 발굴하고 기억할 수 있는 작은 움직임이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이 여성들의 목소리가 현재, 그리고 미래에 한국의 수많은 여성들이 비상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역사적 상상력이 풍부한’ 역사가로서 췌사를 하나 붙이고 싶습니다. 제막식 당일 아침부터 내내 굵은 빗방울이 몰아치다가 그치기를 반복해 정말이지 마음이 조마조마했지요. 그런데 기념식이 진행되던 5시부터 1시간 동안 하늘이 잠잠했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저세상의 수많은 이소사들, 김소사들이 내려다본 것은 아닐까 상상할 뿐입니다. 올해 10월 31일에 ‘여권통문의 날’(9월 1일)이 법정 기념일로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그래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여권통문=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여성들이 이소사(李召史), 김소사(金召史) 이름으로 발표한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始通文)’.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인권선언서다. 여권통문 발표 이후 여자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조직된 찬양회는 최초의 여성단체로 기록된다. 여권통문은 첫째,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으며 둘째, 여성도 남성과 평등하게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고, 셋째, 문명 개화정치에 여성들도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http://www.etoday.co.kr/news/view/1381421 기사 참고


                                                                                                                                               

   

기계형  

국립여성사전시관장. 국제여성박물관협회(IAWM) 집행위원 및 아시아 대표. 인류의 오랜 기억의 터이자 문화유산인 박물관에 여성이 없다는 질문을 던지며 창의적 박물관 공간을 만들고자 고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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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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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간지실 (39.XXX.XXX.116)
잘 읽었습니다.여성계의 분투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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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8 16: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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