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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벌거숭이의 집들이
노경아 2020년 02월 07일 (금) 00:05:18

23년 전 삼복더위에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전투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달포쯤 지난 9월, 시누이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친정 엄마와 함께 사는 올케가 고마웠는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네 세간살이가 허술해 보였는지 다섯 시누이는 바리바리 물건들을 짊어지고 왔습니다. 

옆 동네 사는, 남편과 열두 살 터울의 맏시누는 된장 항아리를 이고 왔습니다.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리에서 부녀회장으로 활동하던 둘째 시누이는 직접 빚어 익힌 찹쌀막걸리와 푹 삶은 토종닭 세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서울 장안동에서 ‘24시간 ○○기사식당’을 하는 셋째 시누이는 갓 버무린 열무김치를 한 통 지고 왔습니다. 넷째는 옷을, 제주도에 살던 다섯째는 말린 고사리와 재잘재잘 ‘수다’를 한아름 안고 날아왔습니다. 엄청난 ‘시월드’ 식구들이지요? 

팔팔했던 시절엔 ‘식구’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집들이 선물이 된장에 막걸리, 김치라니…. 심지어 이 좁은 집에서 다들 자고 간다고, 휴~’ 그날 밤, 이런 못된 생각을 하며 입을 댓 발은 내놓고 있었죠. 천둥벌거숭이의 마음을 읽은 듯 다들 잠 든 시간에 시어머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어미마저 돈 벌러 나가면 육남매가 저희들끼리 서로 돌보고 의지하며 살아왔단다. 고집불통 막내가 학교에서 친구들한테 맞고 들어오면 다섯이 우르르 몰려가 그 아이를 때려 주기도 했지. 극성맞은 구석이 많을 게다. 힘들어도 참아 가며 의좋게 잘 지내거라. 날도 더운데 다섯 모두 초대해 먹이고 재워 주니 참 고맙구나.” 순간 시커먼 속을 들킨 것 같아 홍당무가 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자주 모일 수 있도록 제가 잘 할게요….” 

23년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지나갔습니다. 그날 육남매와 며느리, 사위의 막걸리 잔을 채우고 “사랑”을 외치던 시어머님은 작년 이맘때 저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된장 항아리를 이고 왔던 맏시누는 뇌졸중으로 세 차례나 수술을 받은 후 머리 절반이 함몰된 채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남동생의 말에도 벙글벙글 웃고만 있습니다. 수다쟁이 막내 시누이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입을 닫았습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나는 푸른 봄빛을 잃고 누런 가을빛이 되었습니다. 삶의 단맛뿐만 아니라 쓴맛, 짠맛, 신맛까지 죄다 보고 나니 식구의 정(情)만큼 귀한 게 없습니다. 

시간과 부모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했던가요. 지난해 12월 집수리를 시작해 한 달 만인 지난달 10일 새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집으로 들어갈 날짜를 정하는데, 시어머님의 부재(不在)가 실감나 먹먹했습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평일 오후 시간대로 이삿날을 정하려는 순간, 시어머님의 괄괄한 목소리가 내 머리를 탁 치더라고요. “손 없는 날로 잡아라. 그래야 너희 모두 무탈하지!” 집에 못 하나 박을 때도 붉은 음력 날짜가 쓰인 달력을 보던 분입니다. 결국 평일 비용의 두 배가량 내고 ‘손 없는 날’로 잡아 이사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신이 인간에 대한 감시를 하지 않아 부정을 타거나 액이 끼지 않는 날이라 하니 제 마음도 편안합니다. 

23년 만의 ‘시월드’ 집들이를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 저 집 전화 통화를 하면서 마음에 구멍이 숭숭 뚫립니다. 막걸리를 빚던 둘째 시누이도 얼마 전 맏시누와 같은 이유로 머리 수술을 했답니다. 셋째 시누이는 당뇨를 앓는 남편 병간호로 넘 힘들다고 하네요. 넷째와 다섯째는 엄마가 안 계신 친정에 오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며 울먹입니다. 

집들이하는 나도, 집알이 오는 그들도 웃으며 시간을 보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깔깔대던 오래전 그날의 집들이가 꿈만 같습니다. “식구들이 자주 모일 수 있도록 잘 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가 밉습니다. 

계획했던 ‘시월드’ 집들이 날에 맛난 음식 챙겨 아버님·어머님을 함께 모신 산소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이 순간 김영무의 시 ‘어머니’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요.
“춘분 가까운 아침인데/무덤 앞 상석 위에 눈이 하얗다/어머님, 손수 상보를 깔아놓으셨군요/생전에도 늘 그러시더니/이젠 좀 늦잠도 주무시고 그러세요/상보야 제가 와서 깔아도 되잖아요.” 

*집알이:새로 집을 지었거나 이사한 집에 구경 겸 인사로 찾아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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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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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121.XXX.XXX.215)
집들이, 그것 정말 셋방살이 해본 사람들은 알 수 있는 가슴벅찬 추억이죠, 집들이를 하고 제일 먼저 산 것이 태극기 꽂이였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 나네요. 세월이 그 추억을 회색빛으로 변색시킨 듯하여 안타깝긴 하지만 그 때 받은 된장과 열무김치와 막걸리와 토종닭을 가끔 위로 전화 한 통으로 갚으며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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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0 09:51:13
2 0
노경아 (121.XXX.XXX.123)
부모가 두 분 모두 떠나시면 형제자매가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 듯합니다. 추억을 매개로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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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0 11:24:57
0 0
김형근 (1.XXX.XXX.179)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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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7 10:59:27
1 0
노경아 (121.XXX.XXX.123)
귀한 댓글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마음도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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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9 10:19:53
0 0
한팡세 (118.XXX.XXX.162)
잘 읽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아침부터 기분이 짠 하네요.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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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7 07:55:52
1 0
노경아 (121.XXX.XXX.123)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족'은 단어만 들어도 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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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9 10: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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