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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脫)교복에서 ‘기생충’으로
이성낙 2020년 03월 04일 (수) 00:12:41

우리 영화 <기생충>이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차지했습니다. 봉준호(奉俊昊, 1969~ ) 감독은 아카데미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과 감독상까지 품에 안았습니다. 때마침 필자가 L.A.지역에 머물면서 그곳 교민의 감흥과 드높아진 긍지를 함께 만끽했기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크나큰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화는 종합예술이기에 그 뜻이 더욱 크다 하겠습니다. 실시간으로 시상식 장면을 보면서 필자의 ‘기억 항아리’에 담겨 있던 많은 에피소드가 생각났습니다.

1960년 독일 유학 초년생 시절의 일입니다. 대학생들이 주로 찾는 곳 중에서 지나간 명화만을 상영하는 극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영화 중 <라쇼몽(Rashomon, 羅生門)>이란 작품이 있었습니다. 필자가 처음으로 만난 일본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라쇼몽>은 1951년, 그러니까 그로부터 9년 전 베니스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기에 친구들과 어울려 감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는 필자의 ‘기억 항아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었습니다. <라쇼몽>이 던진 ‘진실이란 여러 측면에서 살펴야 한다’는 메시지가 종종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런 한편으론 ‘우리 한국 영화는 언제?’ 하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일종의 ‘한’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얼마 후 한 독일 친구가 급히 필자의 방을 노크했습니다. 그는 김승호(金勝鎬, 1918~1968) 주연의 영화 <마부(馬夫)>가 1961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특별심사상’을 받았다는 ‘특종’ 기사가 실린 신문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보다 더 놀랍고 기뻐한 건 바로 필자였습니다.

소식을 전해준 친구는 그 며칠 전 “오늘 영화나 보러 갈까?”라는 필자의 제의에 “어느 나라 작품인데?”라고 묻더니 “독일 작품”이라고 대답하자 대뜸 “그럼 난 안 갈게. 독일 영화는 아직 수준 이하”라고 하던 영화광이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한국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필자는 더욱 놀라웠습니다. 당시 독일 언론매체들은 한국 영화 <마부>를 대대적으로 논평하였습니다. 오늘 다시 돌이켜보아도 경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最貧國)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던 시절이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아마도 서구 언론은 멀고도 먼 동방의 최빈국이 영화라는 종합예술 분야에 얼굴을 내민 걸 신기하게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몇 해 전 독일 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이 한국 문화를 언급하며, 그동안 한국이 직물(의복)이나 스마트폰을 유럽 시장에 팔더니 이제는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과감한 행보를 보인다고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서울에 거주하는 독일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근래 베니스영화제나 칸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의 수상 소식이 좀 뜸하다는 언론 보도 얘기가 나왔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한 독일 지인이 “독일은 입상은커녕 주최 측으로부터 초청도 받지 못했다”면서 “그래도 한국은 꾸준히 초청을 받는다”며 조금은 냉소적으로 위안을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생충>의 쾌거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 번은 종로 고서점에서 1960년대의 월간지 <사상계>를 뒤적이다가 한국 여자 배구팀이 한일전에서 완패하긴 했지만, 배구 역사상 대(對)일본전에서 한 세트를 따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는 걸 부각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50년대 후반만 해도 한일 배구전이 있으면 백전백패하던 걸 기억하고 있기에 필자는 그 기사가 꽤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팽팽한 우열 속에서 우리나라 팀이 우세를 견지한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일본 여자 배구 올림픽팀의 코치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요컨대 우리나라가 오늘날 선보이는 여러 면모, 그중에서도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입지는 결코 우연이거나 한 귀재가 내놓은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괄목할 만한 변화는 1980년대 우리 사회에 나타난 변혁과 무관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가 삼엄하고 암울했던 군사 정권 시대인 1982년에 ‘야간통행금지령’이 해제된 것입니다. 천지가 개벽하고 신세계라도 맞이한 듯 행복해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곧이어 중·고등학생의 두발(頭髮) 자유화가 이뤄졌고, 그다음 해인 1983년에는 중·고등학교의 교복 자율화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당시 필자는 우리 청소년들이 드디어 두발과 교복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매우 긍정적인 사회성을 엿보았습니다. 또한 그즈음 전면적으로 등장한 컬러 TV도 사회 분위기를 밝히는 데 한몫했다고 믿습니다. 그때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우려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두발 자율화 조치로 인해 학생들의 ‘행실’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교복 자율화가 빈부 계층의 갈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은 일본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한국을 단체 방문하는 일이 많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일본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의 두발 및 복장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가장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도쿄를 방문했을 때, 필자가 일본인 동료 교수와 함께 전철을 타고 가다가 일본 학생들의 교복 차림을 보고 “일본에는 아직도 교복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군요” 하고 말하자 그 교수가 필자에게 전해준 에피소드입니다. 그 얘길 하면서 많이 언짢아하던 동료 교수의 얼굴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공식화되고 규격화한 환경에서의 창작 활동은 어느 장르에서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집약된 쾌거는 한 특별한 창작 예술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일찍이 시작한 ‘탈교복’ 및 두발 자유화와 무관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특유한 역동성과 맥을 같이한다고 믿습니다.

한국 영화 100년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궤도를 돌이켜보면서, 베를린영화제의 쾌거가 있었기에 베니스영화제와 칸영화제의 영광이 있었고, 마침내 올해 미국 아카데미상의 영광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기초가 든든하기에 앞으로 더 큰 영광이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 있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필자의 ‘기억 항아리’가 더 많은 아름다운 에피소드로 채워지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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