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탕과 정신대(挺身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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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과 정신대(挺身隊)

황경춘

2008년 03월 11일 (화) 00:12:31

“오늘 점심은 설렁탕이 어때?”
“좋아요.”

두 늙은이만의 살림살이지만 세 끼 식사에 무척 신경이 쓰이는 아내는 가볍게 응했습니다. 설렁탕 외식은 거의 계동 입구에 있는 단골집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아들놈이 그 근처 중학에 다닐 때의 친구 집으로 그럭저럭 35 년이 넘는 단골입니다. 직장이 근처에 있었던 얼마 동안엔 외국인 친구와도 자주 갔던 집입니다.

안국역에 내리자 나는 아내를 우선 옛 한국일보 건물 뒷길로 안내했습니다. 구호 외치는 소리와 스피커 잡음이 들리자 아내는 “저게 뭐냐”고 의아스럽게 물었습니다. 설렁탕이 본 목적이 아니라 바로 이게 내가 2~3 일 생각하다가 꾸며낸 트릭이었습니다.

그 날이 바로 수요일.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항의시위가 정각 12시에 어김없이 이곳에서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1992년 1월 8일에 시작한 이 시위가 800회를 맞이했다는 신문기사를 본 후의 계획이었습니다.

마침 황사도 깨끗이 가시고 따뜻한 햇살이 제법 봄의 전령처럼 느껴진 날이었습니다. 현역시절 몇 번 취재한 경험이 있는 나는 갑자기 내 눈으로 다시 확인해보고 싶은 흥미가 솟았고, 아내에게도 이 장면을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정신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쓰려는 것이 아닙니다. 불행한 과거를 가진 이 불쌍한 할머니들을 우리는 처음부터 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고, 가해자인 일본은 이 우리의 호칭을 핑계 삼아 당시의 죄악을 호도하려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광복 후 60 여년이 지난 지금, ‘정신대’를 정확히 알고 그 당시의 참상을 체험한 연령층이 점점 감소해 일제의 학정(虐政)을 직접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1941년 일본 군부가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하기 전, 당시 중국과의 끝없는 소모전으로 인적 자원의 고갈을 느낀 일본정부는 1937년에 소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시작하고 다음 해 4월에는 ‘국가총동원령’이라는 법을 제정하여 여성의 근로동원마저 합법화하는 길을 터놓았습니다.

뒤이어 1941년 11월, 즉 진주만 기습공격과 대미 선전포고를 동시에 한 한 달 전에 국가근로봉사대의 설립을 명하여 14 세에서 24 세까지의 여성을 1 년에 30 일 동안 동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전세(戰勢)가 더욱 기울어진 1943년 9월에는 17 가지로 분류된 국내 비군수(非軍需) 산업체에 대해서는 남자의 고용을 일체 금하여 여성 근로자만을 쓰게 만들어 ‘여자근로정신대(女子勤勞挺身隊)’를 정식으로 발족시켰습니다.

1944년 8월에는 이 여자정신대의 대원은 ‘지원자’만으로 구성, 1년간 의무적으로 근로 봉사케 하는 것으로 개정했지만, 실지로는 지원이 아닌 강제동원이 감행된 것입니다. 중학교에서는 교직원이, 일반 사회에서는 면 사무소 등 행정기관이 강제 동원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당시 짐병검사를 마치고 학업을 중단하여 시골집에서 입영영장을 기다리고 있던 저는 가끔 면 직원들의 ‘처녀 몰이’를 피해 동네 처녀들이 근처 산 중으로 도망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원된 조선여성의 일부가 소위 군 위안부로 강제 편입되어 일본군의 성 노예로 1945년 8월 종전 때까지 주로 중국 각지에서 고생한 것입니다. 즉 일본 본토나 그 밖의 지역에서 일본 산업체에서의 강제 노동에 징발된 여성이 많았지만, 그 중 일부는 성 노예의 지옥에서 광복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정신대’라는 미명 아래 끌려갔기 때문에, 처음에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질 때 ‘정신대 할머니’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호칭은 ‘정신대’로 동원되어 정상적인 직장에서의 강제노동에 종사한 많은 일반 여성에 대한 오해와 사회적 편견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일본 정계나 극우(極右) 단체의 일부는 이런 사실을 왜곡하여 당시 정신대로 간 여성은 모두 군수산업에 동원되었던 것이라 강변하고, 위안부로 일한 여성은 대개 돈벌이를 자원해 간 자들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미국 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규탄결의안이 심의중일 때 일부 일본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이 워싱턴 포스트에 전면 ‘의견광고’까지 냈던 것입니다. 유명한 여성언론인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등 5 명이 발기인이 되고 광고에 찬동한 58 명 중에는 전 방위청장관 아이치 카즈오(愛知和男) 등 7 명의 국회의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이 광고는 정부나 군부가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했다는 역사적 문헌이 없다고 강변하고, 군부가 위안부 강제동원을 금지한 증거로 1939년 8월3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위안부 강제동원 민간업자를 경찰이 엄벌했다는 기사를 인용하는 구차함도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정신대라는 단어의 오용(誤用)이나 남용(濫用)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시위 당일 아침에도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를 애도하며 묵념을 올리던 시위 현장을 무거운 마음으로 빠져 나온 우리 부부는 계동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설렁탕은 포기하고 근처의 메밀국수 집에서 허기를 채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