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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번이라도 괜찮아”
신아연 2008년 03월 11일 (화) 00:17:35
갈아탈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외국의 낯선 공항에 갇혀 있어야 할 때, 슬하에 자식 챙기듯 짐보따리 지키느라 깜빡 졸다가도 화들짝 놀라 깨고 ,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그 짐을 다 끌고 가야 하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결혼을 했다는 대학 2년 선배가 있습니다.

여행을 같이 다닐 사람이 있으면 서로 짐도 지켜주고 홀가분하게 몸뚱이만 ‘데리고’ 화장실 볼일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의 짝을 찾았다는 선배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그렇게해서 그 선배는 47세에 독신 생활을 접고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1년이 되어 갑니다. 공교롭게도 그 선배가 독신을 청산한 지난 해에 저는 반대로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른바 ‘돌아온 싱글’이 되었습니다.

이번 달로 선배는 결혼 1주년, 저는 이혼 1주년을 맞았습니다.

선배와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주고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브리즈번에 살기 때문에 한 달에 두어번 정도는 만나서 수다를 떱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얼추 20여 년을, 한 사람은 주로 살림만 해왔고 또 한 사람은 공부밖에 모르다가 두 사람 모두 커리어를 180도 바꾸고 나니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란 둘다 만만치 않습니다.

선배는 ‘살림 9단’인 제게 음식 만드는 것을 이것저것 물어옵니다. 공부에 청춘을 다 바쳐 박사까지 되었지만 미역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는 법을 학과목에서 접하지는 못했던가 봅니다.
장학금을 받아 외국 유학을 하고 영어를 물처럼 술술 말하는 ‘잘난 선배’에게 제가 우쭐해지는 순간입니다.

이따금 제가 ‘오늘 저녁 뭐 해먹었어?’ 하고 물으면 ‘그냥…, 무국적으로 아무거나 .. 아연씨는 아마 못 먹을 걸..’ 하고 자신없어 합니다. 그러면서 ‘베테랑 주부’의 음식 솜씨를 배우러 주말에 제 집에 놀러오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독신생활의 ‘지존’인 선배는 혼자 살아가는 데는 산전, 수전, 공중전, 우주전까지 다 치른 노회함으로 저의 위태로운 홀로서기를 뒷심으로 받치는 역할을 단단히 합니다.

남편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진 저는 ‘생존의 처절한 몸부림과 두려움’을 내공깊은 선배에게 시시콜콜 털어놓고 의논합니다.

먹고 살자고 오늘 내가 이런저런 설움을 당했다고 동정을 구하면서 ‘ 아직도 내가 배가 불러 이러는 것 같아? ‘ 하고 엄살을 떨면 ‘응, 그런 것 같애’하고 무심하게 대꾸합니다. 한번은 ‘ 그 일 대신 이 일을 해보면 어떨까’ 라고 상의하니 ‘아연씨가 이때까지 한 것 중에 제일 좋은 생각인 것 같아’ 하면서 예의 짐짓 무심함으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프로 주부였던 제게는 살림이 아무 일도 아니듯이, 모든 것을 혼자 꾸려가는 것에 이골이 난 선배는 제게 이런 저런 살 길을 능숙하게 조언해 줍니다.

무슨 일이든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처하면 다른 것보다 무섬증이 먼저 달겨드는 것이 참 싫습니다. 뒤이어 어설픔과 혼란스러움이 찾아오고 자기 연민과 자기 구박이 번갈아가며 가뜩이나 지쳐있는 마음을 괴롭힙니다.

50이 내일 모렌데 미역국도 제대로 못 끓이는 선배는 봐줘도 괜찮은 것 같은데, 이 나이 되도록 제 밥벌이 하나도 해결 못해 전전 긍긍하는 제 자신은 면박을 주고 자책을 하게 됩니다.

익숙했던 환경을 떠나 새생활에 적응하느라 시행착오를 일으키는 것일 뿐이니, 온 에너지를 집중해서 몰두를 해도 시원찮은 판에 스스로 위축되어 초라하게 여겨서야, 될 일도 안 된다는 걸 모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어찌 저 뿐이겠습니까.

실직을 하고, 퇴짜를 맞고, 낙방을 하고 도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저처럼 풀이 죽어있는 사람들 모두와 어느 책의 구절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설사 네 탓이라고 해도 괜찮아. 정말 괜찮아. 천만번이라도 괜찮아.”

그러기에 공부 좀 열심히 하랬지?, 있을 때 잘하지, 일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뭐하고 있었어? ,그 정도도 예상 못했단 말이야?, 웬만하면 다시 합치지.. 등등 주변에서 날리는 무책임한 화살을 어느 정도는 막아내는 방패가 되어줄 겁니다.

신 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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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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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웅 (211.XXX.XXX.129)
최기웅선생님 2008-03-12 08:18:50 답변하기
진솔한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멋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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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8 09: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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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99.XXX.XXX.82)
나 혼자만 느끼고 격고 있는줄 알았는데,,,혼자서 생존해야하는 생존의 위기감이 장난이 아님니다.하지만 잘 , 아주 자아알 살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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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7 14: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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