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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 네 성씨
서진형 2008년 03월 15일 (토) 07:51:43

중학교 1학 때입니다. 국어 선생님께서 각자가 칠판에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고 그 뜻을 풀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 있게 내 이름 석자 徐 鎭亨을 한자로 쓰고는 "달 서, 진압할 진, 형통할 형"이라고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뜻 밖에도 “천천할 서를 달성 서로 읽는 놈이 어디 있어”라고 정정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때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릅니다. 4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보면 그 날 나는 아주 큰 낭패를 당한 셈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성씨가 중요하며, 집안 성씨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지내 온 조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곳 미국 땅에서도 한민족의 기개와 긍지를 갖고 그 어려운 이민 생활을 이겨내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재미 교포사회 주위를 가만히 살펴 보면 자기 성씨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한 약속 중에 하나가 “내가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성을 간다 갈아”라고 장담을 하는 것에서 보듯이 성씨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포들이 태평양을 건너 오면서 자기 성씨를 잘못 관리하여서 전혀 엉뚱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 성씨를 가진 가족이 오손도손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데, 미국 법으로는 완전히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꼴이 되어 있습니다. 콩가루 집안인 셈입니다.

서씨의 영문 표기를 'Seo' 'Suh' 'So' 'Sir' 'Sur'등 여러 가지 철자로 씁니다. 결국 하나의 본을 가진 서씨가 아니라, 미국에서는 여러 본을 가진 다양한 서씨를 양산한 셈입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기에 중앙정부에서 준비해 준 공무여권에 담당 공무원이 외국어 표기 표준 철자법에 의해 정해 주는 영문 표기로 Seo로 결정되었으며, 어머니 여권은 여행사가 급하게 만들어 주는 바람에 Suh로 여권을 만들었으며, 딸은 회사의 급한 출장요구로 외국 초청회사가 보내 준 초청장에 적힌 영문철자 대로 Sur로 여권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아들은 군대에 가서 만드는 바람에 So로 여권을 만들었습니다.

한 가족 모두가 각기 다른 영문 표기 성씨 여권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각자가 따로 미국으로 오는 바람에 가족의 성씨를 정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른 성씨의 여권을 가지고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내왔기에, 구태여 성씨 정정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래로 대한민국의 성씨는 족보를 중심으로 한자 성씨를 가지고 있었기에, 한 가족은 물론이고, 사촌 팔촌 심지어는 사돈의 팔촌까지도 한자 성씨를 기준으로 해서 혼돈이 올 수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항렬을 따르는 집안일 경우에는 이름만 가지고도 비교적 정확하게 촌수를 따질 수가 있는 좋은 시스템을 가지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발음 중심의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영문 성씨를 만들 때에, 성씨에 대한 기본적인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권을 관장하는 국가기관에 문의해 보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영문 표기를 해 오면 개성을 중시하여서 그대로 받아 준다고 했습니다. 성씨가 아닌 개인 이름이야 각자가 개성에 알맞게 표현을 하고 영문 표기 또한 적절하게 표기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혈통과 족보를 중시해 온 한민족의 후예인 우리들이고 보면 가장 기준이 될 성씨를 각자에게 영문 표기의 자유를 주는 바람에 엄청난 혼돈을 가져온 것입니다.

지금 이민 1세대가 살아 있을 때야 그나마 "너 달성 서 씨, 학유공파 28대손"이라고 일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이민 2세들은 한자는커녕 한글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성장하는 것을 보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얼마 지나게 되면 사촌 간이나 팔촌 간에도 완전히 다른 성씨로 만나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친족 간에는 혼인을 금지 했던 미풍양속까지 무너질 것을 상상해 보면 가장 시급하게 우리 재미동포 사회에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시급한 과제라고 봅니다.

한민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공리 공론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들의 성씨 영문 표기 문제부터 바로잡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민 1세대가 이 정도 여력이 있을 때에 범 동포적인 운동이라도 벌여야 하겠습니다.

 뉴욕에서 원자재 거래회사인 글로벌GTC를 경영 중인 재미교포 사업가.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 OKTA) 회장과 세계한상대회 공동의장을 지냈으며, 해외 한인 기업인들의 협력과 후진 양성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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