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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의 덕(德)과 멋
노경아 2020년 07월 28일 (화) 00:00:51

 

여름 나기가 점점 힘이 듭니다. 유독 여름만 해마다 몸집을 불리고 있습니다. 초복, 중복을 지나면서 덥고 습한 날이 계속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마스크까지 쓰고 지내려니 숨이 턱턱 막힙니다.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한적한 동네 뒷산, 개울가를 걸어보지만 땀을 씻기에 바람은 감질납니다.

때마침 발길이 닿은 인사동, 허름한 상점에 내걸린 부채가 눈에 들어와 값을 치렀습니다. “눈 맞아 휘어진 대나무를 누가 굽었다고 하였던가. 굽힐 절개라면 눈 속에서 푸르겠는가”라는 부채 속 시 구절이 맘에 들어서였습니다. 부채엔 없지만 마지막 연 “아마도 歲寒孤節(세한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를 읊으니 한겨울 차가운 바람이 느껴져 뼛속까지 시원합니다.

부채에 담긴 고려 유신(遺臣) 원천석의 시와 작자 미상의 그림을 보고 있으니 문득 선조들의 여름 나기 비법이 궁금합니다. 엄중한 예법 아래 명분과 체통을 지극히 숭상했던 조선시대엔 한여름이라도 옷을 벗고 물에 뛰어들면 풍기문란으로 다스렸다지요. 그러니 계곡에서 발만 담그는 탁족(濯足)이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부채를 부치는 납량(納凉)이 고작일 수밖에요. 부채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여름 선물로 으뜸이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남성들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선공(부채 장인)에게 미리 부채를 맞춰 뒀다가 더위가 시작되면 드라마 속 대사처럼 “우리 애기, 선물~” 하며 건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큰맘 먹고 명품 가방이나 구두를 사주며 으쓱하는 요즘 남성들처럼요. 시원한 바람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햇빛을 가려주고, 깔개도 되어 주는 등 쓰임새가 많은 부채는 당시엔 ‘명품’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채찬가’에 나오는 부채의 아홉 가지 덕을 살펴볼까요.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아주니 1덕, 필요할 때 땅에 깔고 앉는 방석이 되어 주니 2덕, 따가운 햇볕을 가려 응달을 들이고 비를 막아주니 3덕, 손에 들고 이리저리 방향을 가리키고, 저 멀리 있는 사람 부르는 데도 쓰이니 4덕, 빚쟁이 만났을 때 얼굴을 가려주니 5덕, 여인이 옷 갈아입을 때 가려주니 6덕, 흥겨울 때 장단 칠 수 있으니 7덕, 모기나 파리를 후려쳐 잡을 수 있으니 8덕, 성질날 때 부채를 확 소리나게 펴거나 그놈을 한 대 때릴 수 있으니 9덕이라.” 부채의 다양한 쓰임보다도 그것들을 ‘덕’으로 풀어낸 옛사람들의 낭만과 해학에 절로 웃음이 납니다.

부채는 순우리말입니다. ‘구급방언해’ ‘삼강행실도’ 등 15세기 문헌에서부터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기록엔 ‘부채’, ‘부체’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혼란스럽습니다.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의 동사 ‘붗다’의 어간 ‘붗’에 도구를 나타내는 명사화 접미사 ‘-에’, ‘-애’가 어우러진 형태로 보입니다.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에’와 ‘-애’가 모음조화 규칙을 깨고 ‘부체’, ‘부채’ 두 가지 형태로 쓰인 것으로 분석됩니다. 혼용되던 두 단어는 19세기 들어 ‘부채’가 우세해지더니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붗다’의 현재 모습은 ‘부치다’입니다.

둥근형의 방구 부채와 접었다 펼 수 있는 접이식 부채(접선) 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하나요? 옛 문헌에 따르면 방구 부채는 집 안에서 여성들이 즐겨 썼고, 접선은 남성들이 외출할 때 썼습니다. 접어서 손에 들고 다닌다 하여 접이식 부채는 ‘쥘부채’라고도 했습니다. 의관을 갖춘 후 손에 부채를 들어야 비로소 패션이 완성될 정도로, 쥘부채는 당시 ‘멋쟁이’의 필수품이었을 겁니다.

부채의 바람은 풍류입니다. 조선 선조 때의 명문장가 임제가 한겨울 어린 기생에게 선물한 부채 속 시를 음미해볼까요. “한겨울에 부채 선물을 괴상히 생각 마라/ 너 아직 나이 어려 모르리라마는/ 한밤중 그리움에 가슴에서 불이 붙으면/유월 무더위에 비할 바 아니니라(莫怪隆冬贈扇杖 爾今年少豈能知 相思半夜胸生火 獨勝炎蒸六月時)

사랑하는 이에게 멋진 수묵화가 담긴 부채를 선물하세요. 그리고 함께 나무 그늘에 앉아 부채를 부치며 무더위를 식히세요. 누군가의 시처럼 부채의 바람은 매우 특별합니다. “대나무와 종이가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으니, 그것이 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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