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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데에 대한 단상
신아연 2008년 03월 24일 (월) 04:25:13
거의 1~2년에 한 번은 한국을 가지만 갈 때마다 매번 전과 달라진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속도감 없는 호주에 살다 보니 무엇보다도 점점 좋은 것이 나오는 한국의 문명 발전 속도에 멀미와 현기증을 느끼게 됩니다.

한국에만 가면 저는 어리버리 정신없는 시골 쥐 꼴로, 세련되고 숨가쁜 서울 쥐들 틈에서 허둥대기 일쑤인 것도 그 탓입니다.

이번에는 요즘 지은 웬만한 아파트에는 죄다 비데가 설치되어 있고 사무실이나 식당, 백화점 같은 공공 장소에도 화장실에 비데 설비가 덧놓여 있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한국에 한 달을 머무는 동안 ‘볼 일’을 보고 ‘손으로’ 뒷처리를 한 일이 거의 없었으니 그 때마다 비데 시대 이후 한국 사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를 곰곰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비데 출현으로 우선 화장지 매출이 뚝 떨어졌을 거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보다 심각하게는 유아들의 용변 처리 훈련이 ‘ 필수’ 에서 ‘ 선택’으로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는 일을 들여다보면 숨쉬는 일같이 하도 익숙해서 마치 용써서 배운 적 없이 태어날 때부터 저절로 된 것처럼 여겨지는 게 있습니다.

‘똥을 누고 뒤를 닦는 일’도 그런 일 중 하나일 겁니다.

하지만 배변 후 ‘능숙하게’ 뒤를 닦게 된 것은 문명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삶의 기본기로서 엄연히 배워서 익힌 일입니다.

저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 ‘휴지는 이렇게 저렇게 몇 번을 접고 손을 뒤로 돌려서 어쩌고 ..’ 하면서 이론을 되풀이하고 그 결과물을 ‘검사’해 가면서 용변 처리하는 법을 반복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한 요즘 젊은 엄마들은 아마도 아이들에게, 똥을 다 누고 나면 화장지 사용법 대신 비데의 단추 누르는 순서를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호주의 어느 홈 스테이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집의 한 한국 초등학생이 용변 후 뒤처리를 못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샤워기를 틀어서 물로 씻어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샤워실에 그대로 둥둥 떠다니는 오물을 치우느라 주인이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비데의 세정 버튼만 누를 줄 알았지 휴지를 사용하여 처리하는 법은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었답니다.

앞으로 어린 자녀들을 호주로 유학 보낼 때는 ‘뒤 닦는 법’을 꼭 가르쳐서 보내셔야 할 겁니다. 호주에는 비데가 설치되어 있는 가정이 거의 없으니까요.

자꾸만 편하고 좋은 것이 나올수록 사람들은 점점 바보가 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빌딩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문이 열리기를 마냥 기다리는 바보 짓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문이라는 게 앞 뒤로든, 옆으로든 밀거나 당기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열리고 닫히는 게 당연한 이치이거늘, 자동문에 습관이 되다보니 ‘어련히 지가 알아서 열려주리’ 하면서 우두커니 서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 골몰했을 때는 자동문이 아닌 문 앞에서도 무심코 하냥 서있게 되니 얼마나 바보 같습니까.

‘멀쩡한 손을 두고도 문을 못 연다’는 맥락으로 본다면 ‘비데 세대’들은 지금 우리 세대보다 손의 한 기능을 못 익히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이제 한국에는 비데가 보편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환자나 노인들, 손놀림, 몸놀림이 불편한 분 들에게는 참 편리한 설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달라져서 점점 좋은 것이 나올 때마다 ‘지금 쓰고 있는 게 그때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스무 살 무렵 대학을 다닐 때 국립 맹학교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학교 화장실이 무척 불결해서 곤혹스럽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앞이 안 보이니 제짝의 양말을 찾아 신는 일이 제일 어렵다’ 던 학생들도 용변 후에 뒤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아직 어리달 수 있는 나이였지만 앞이 안 보이는 학생들로 인해 ‘정조준’ 되지 못한 화장실의 오물과 휴지들이 더럽다는 생각에 앞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학생들의 처지가 딱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맹학교의 화장실 시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그 시절, 눈이 안 보이던 그 학생들을 위해 지금처럼 비데 설비가 있었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 번 한국에 갈 때는 또 어떤 좋은 것이 새로 나와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지저분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미안합니다.

신 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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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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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o (211.XXX.XXX.216)
실감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너무 풍요로워지고 정신적으로는 너무 가난해져 가는 우리네 사는 모습에 거울, 아니 돋보기를 들이댄 기분이네요. 이 땅에 살면서도 아연실색할 일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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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7 18: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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