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향우회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시 전체의 향우회가 아니라 동네에 있는 구 단위의 향우회로, 한 해에 네 번 만나는 자리에는 30~40 명이 모입니다.

한때 잘 아는 선배나 친구가 회장이나 부회장 자리에 있던 전체 향우회의 신년 하례식엔 빠짐없이 나간 적도 있었으나, 최근에는 연락을 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구 향우회에 총무로 있는 젊은 친구의 부지런함에 끌려 여기에는 시간 날 때엔 되도록 참석해 왔습니다.

직접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제가 가장 연장자인 모임이었으나 한두 번 가는 사이에 연줄로 친해진 분도 몇 분 생겼고 “안 나오시면 혹시…하는 생각을 갖게 되니 꼭 참석해 주세오” 정도의 농담도 할 수 있는 고향 후배도 생겨 별 허물없이 시간 보낼 수 있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식사가 진행되고 소주잔이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총무가 일어섰습니다. 고향 특산물 흑마늘이 중국산 가짜 때문에 판매하는 데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설명하고, 고향 조합에서 이에 관한 홍보를 위해 직원이 직접 왔다고 소개했습니다.

들뜬 분위기가 좀 가라앉고 나서 비디오까지 가져 온 홍보팀의 설명이 좀 장황하게 계속되었습니다. 좌중이 좀 지루해 하는 것 같자 총무가 서둘러 이들의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술자리가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향우회 모임에서 사기를 당한 일이 많았다는 이 친구들의 보고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분이 “아니, 지금 그 사람들도 유창한 표준말을 쓰던데 혹시…”하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총무가 그렇지 않다고 해명을 했습니다. 또 한 분이 “아니 학실(확실)이 홋가(효과)가 있다고 우리 사투리로 설명하면 다들 금방 믿을 텐데”라고 발언하자 폭소가 터지고, 이내 사투리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갔습니다. 중모음(重母音)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이곳 사투리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 옛날엔 핵고 다닌다고 했지요”하고 한 분이 말하니 “아니 할머니들 가운데엔 헷꼬라 말하는 분도 있었어요“하며 좌중을 웃겼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고향 사투리에 모두가 한 마디씩 했습니다. 포리(파리), 질(길), 우렁셍이(멍게)에서부터 특히 우리 고을 독특한 “하모”와 “…하시이다”라는 어법에까지 배꼽 잡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습니다.

내 고향은 경남 남해입니다. 유독 사투리와 억센 억양이 심합니다. 고향 친지로 관선 사울시장을 지낸 분이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그 분의 직원 훈시 자리에 참석했는데, 고향 출신만이 알 수 있는 사투리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속으로 웃었지만 다른 사람의 반응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신 남도 출신 어느 야당지도자가 서울외신기자클럽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때 통역을 맡은 분은 정부 고관을 지낸 이북 출신의 영어 실력자로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준비된 연설문 낭독이 끝나고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이 진행되는 도중, “아재비 떡도 커야 사먹지“라는 속담이 이 야당지도자 입에서 나왔습니다. 통역을 맡은 분이 ‘아재비’라는 남도 사투리를 알아채지 못한 탓인지, 통역이 좀 시원찮았습니다. 그러자 야당정치인이 이를 지적하고 옥신각신하다가 한국인 기자들의 도움도 받아 고비를 넘겼습니다.

사투리에 관해서는 이런 일도 생각납니다. 외국어대학을 나온 외신기자 동료 한 사람은 몇 년째 영남사투리 대통령이 계속되는 데 대해 진심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영방송을 통해 영남 사투리가 전국으로 확산돼 표준어의 오염이 심각하다는 것이 이 친구의 지론이었습니다. 전라도 출신인 이 친구는 비교적 사투리가 적었습니다.

청와대 대회의장에서 대통령이 외신기자들에게 오찬을 베푼 적이 있었습니다. 간담회 순서가 시작되자 이 친구는 평소에 품고 있던 우려를 정색으로 표명하며 대통령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때 무슨 대답이 나왔는지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별 ‘거리’가 되는 답변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나 자신 고향을 떠난 지 60년이 넘지만, 이 사투리 문제는 아직도 나를 괴롭힙니다. 아이들의 지적도 있어 내 노력이 부족했음을 통감하지만 이제는 때가 늦었다고 체념하고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외신기자 동료로 나와 절친한 함경도 출신 동갑나기가 있었습니다. 함경도 사투리도 교정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함경도 물장수 이야기로 유명한 북청 출신 ‘아바이’인 이 친구는 광복 후 곧 남하하였다고 들었는데, 그의 표준어는 완벽하였습니다. 피난수도 부산에서 알게 된 이 친구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그가 함경도 출신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투리가 없었습니다. 영어도 썩 잘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어학에 선천적 재능이 있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습니다.

일본은 봉건제도로 150년 전에만 해도 200 명 이상의 성주가 소위 일성일국(一城一國)을 이루고 있었으니 사투리도 우리 이상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국어교육의 결과인지 시골까지 표준어가 잘 보급돼 있습니다. 우리보다 표준어를 따라 하기가 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통하게 한 가지 우리와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판소리가 반드시 남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처럼 그들의 만담은 거의 오사카(大阪) 부근의 소위 ‘간사이벤(關西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같이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 사투리가 많은 것은 이해가 가지만 국토가 훨씬 작은 우리나라에서 이에 따른 문제가 많다는 건 좀 우습습니다. 하지만 우리 고향에서는 사라져가는 사투리를 남길 목적으로 사투리 사전을 편찬했고 사투리 글짓기 경시대회도 열었다고 하는 기사를 지방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육지에 나와 학교나 직장에서 독특한 섬 사투리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 부터 조롱을 받은 경험이 있는 고향 인사들이, 그런 젊었을 때의 서러움을 애향심으로 극복 초월하여 사라져 가는 사투리를 보존하려는 노력에 타향에 사는 향우들은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고 후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