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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절이 공존하는 3월의 제주
최창신 2008년 03월 27일 (목) 00:58:33
걸어서 탐라(耽羅) 일주(2)

깊은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어느덧 비행기가 제주공항 활주로 위를 진저리치며 구르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시작이다.’ 심호흡을 하고 공항청사 밖으로 나갔습니다. 타이어에 바람을 펌프질하듯 온 몸에 긴장감을 팽팽하게 불어 넣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빗줄기가 그리 굵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걷기로 작정하고 '탐라 일주'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서해안을 달리는 일주도로를 타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빗줄기는 시나브로 굵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 3월의 제주 밭은 여느 지방 오뉴월 풍경과 흡사합니다. 시퍼렇게 자란 채소 잎이 풍성한 수확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가는 길에 마침 제주일보사가 있어 김창기 (金昌琪)전무를 만나기 위해 잠시 들렀습니다. 등산복 차림에 잔뜩 비를 맞은 몰골로 남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멋적어 로비에서 인사만 나누려 했으나 한사코 들어오라 하여 차대접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의리의 사나이'로 알려진 김전무. 왕년에 제주도를 대표했던 태권도 선수출신으로 지난 20년 동안 실무 부회장으로 제주도협회를 이끌었던 정통 태권도 맨입니다. 자칫하면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질 것 같아 서둘러 그의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신문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노형동의 한식당에 들러 다소 늦은 점심식사를 마쳤습니다. 제주도 특유의 고등어 조림. 맛이 좋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무엇인들 맛 없었을까?

오후 1시30분, 30㎞ 떨어진 한림까지 가기로 목표를 정하고 일주도로로 접어 들었습니다. 涯月까지 가는 긴 거리에서 유일한 동반자로 따라나선 태권도신문의 김창완 국장과 나는 악전고투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잠시 꺼끔하던 비가 세찬 빗줄기로 바뀌었고 강한 바람에 실려 얼굴을 때리는데 매우 따가웠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굵은 우박이 섞여 있었습니다. 앞서 가는 김 국장은 갈짓자걸음. 나는 더 했겠지요. 그만큼 바람이 강했습니다. 버스 타고 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았으면 술에 잔뜩 취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너무 손이 시려 면장갑을 하나씩 사서 끼었으나 그나마 비에 젖고 바람이 매서워 아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습니다.

‘이게 뭐야?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유심히 체크했지만 영상 10도 정도의 봄날씨였는데… 이건 사뭇 고약한 겨울이잖아!’

심신을 가다듬고 좌우 풍경을 꼼꼼하게 관찰하며 걷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현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걷고 있는 서해안 지방에는 기이하게도 4계절이 공존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 섬진강변 매화 꽃소식이 전해진 지도 오래. 바다 건너 남쪽나라 제주에는 아직도 매화가 한창입니다.  
유채꽃과 매화 등이 만발하여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가 하면, 한여름에나 볼 수 있을 만큼 왕성하게 자란 양배추류의 밭작물이 힘찬 물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노란 귤들이 탐스럽게 달려 있는 광경을 보면 틀림없는 가을이고, 느티나무 벚나무 목백일홍 등의 喬木들은 앙상한 가지를 옹송그리고 서서 겨울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험상궂은 날씨가 천지를 음산하게 뒤집어 놓으니, 여기서는 마치 '밝음과 즐거움, 소망'을 주제로 하는 시인 김남조(金南祚)의 계절과 죽음이나 파멸, 빈곤이 특징적인 T.S. 엘리오트의 계절이 한데 섞여 불협화음으로 독특한 조화를 빚어 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든 계절은 하나의 출발, 가을이 새로 열리는 곳에 씻은 마음의 청과(靑果)를 담아 내리라. 한 계절은 오고 하나는 또 가건만 빛과 열락(悅樂)을 금하는 계절은 없다. 삶의 욕구와 즈문 소망을 못 갖게 하는 계절은 결코 없다." (김남조/ '생명의 시원(始源)'에서)

"겨울은 바다에서 죽음을 끌고 올 것이다. 파멸의 봄은 우리의 문을 두드릴 것이고 처참한 여름은 시내 밑바닥까지 태워 버릴 것이고, 가난은 다시 쇠진하는 10월을 기다릴 것이다." (T.S. 엘리오트/'대성당의 살인'에서)

애월면 고성리를 지날 무렵 날씨는 많이 누그러졌으나 발에 희미하지만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악천후 때문에 쉬지 않고 걸어서 그런 모양이었습니다. 두어달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왼쪽 발에 통증이 샘물처럼 고여 가고 있었으며 오른잘 두번째 발가락이 마비증상을 보이며 부어 오르는 듯 했습니다. 오른쪽 허벅지는 위에서 아래로 날카롭게 베는 듯 한 아픔이 훑어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왼쪽으로 올려다보이는 항바두리성에서 7백 30여년 전 몽고 침략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다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한 김통정(金通精)의 삼별초 최후부대가 당했던 그 통한의 아픔과 좌절에 비할 수 있으랴!


최창신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다.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태권도신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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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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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만돌 (124.XXX.XXX.58)
젊은 저도 도전 못한 것들을 장로님께서 낮선곳으로 떠나시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시는 모습에 감동받았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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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5 20: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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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219.XXX.XXX.9)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한다는데 춤이라도 출까요? ^^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써본지가 오래되어서 면발처럼 글발이 술술 나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려는지... 참고로 컴맹이라 200자 원고지에 글을 쓰면 다른 분들이 컴퓨터 작업을 해줍니다. 답장이 늦거나 없더라도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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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8 02:36:55
0 0
이석봉 (123.XXX.XXX.58)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몸만 탄탄하신게 아니라 내공이 상당하신.
오래간만에 맛깔난 글을 읽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답변달기
2008-03-27 10:48:3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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