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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멀미가 날 때 -서경식.김상봉,『만남』
김이경 2008년 03월 29일 (토) 00:11:36
도무지 싫은 소리를 할 줄 모르는 K가 머뭇머뭇 조그맣게 말합니다. “우울증인지, 아무도 만나기 싫고 사람이 무섭고, 혼자 집에만 있어요.” 나도 그렇다고 했더니 설마 하는 표정입니다. 처음 본 사람과도 쉬 말문을 트고 한두 시간 끄떡없이 떠들 만큼 수다스런 제가 맞장구를 치니 영 미심쩍은 거지요. 별 수 없이 “20여 년 학교생활에 친구가 하나”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같은 직장에 다닐 때 제 쓸쓸한 인간관계를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그 정돈 줄은 몰랐다며 웃습니다.

그때부터 K와 저는 관계의 덧없음에 대해, 만남의 피로와 참된 우정의 불가능에 대해 공감 어린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헤어져 돌아오는 길, 못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창 젊은 친구에게 사람에 대한 회의나 부추긴 꼴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좀 늦었지만, 사람과의 만남에 멀미를 느끼는 K에게 처방전을 보내려고 합니다. 서경식과 김상봉의 『만남』입니다.

서경식의 글을 읽으면 발이 차가워지고 가슴이 서늘해져서 이불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베갯잇을 적시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누구는 그를 두고 “면도날 같은 글”을 쓴다고 하던데 저는 “이불을 덮고 읽어야 하는 글”을 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허나 무어라 말하든 서경식의 글이 가진 힘에 대해선 이론이 없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김상봉에 대해선 그저 고적할 뿐이라 해도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김상봉을 처음 만난 건 그가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문예아카데미에서 철학 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중 나르시스 신화를 함께 읽었는데, 그 짧은 이야기에서 타자를 수용한 적 없는 서구철학의 ‘홀로주체성’을 끌어내는 열강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 뒤 그가 쓴 『나르시스의 꿈』을 읽으며 다시 감동했습니다.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보한다면 그건 슬픔의 힘 때문이라고 믿고 있던 제게, 김상봉이 천착하는 슬픔의 철학은 깊은 공감을 주었습니다. 허나 아쉽게도 한국 학계에서 그는 외로워 보였습니다. 서구의 철학과 개념들을 수입하는 데 부지런한 이론 풍토에서 김상봉은 섬처럼 홀로 떠 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눈 밝은 편집자 덕분에 그와 서경식이 드디어 만났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서경식, 김상봉 두 사람에게도 다행이고, 남의 개념이나 읊조리는 한국 학계에도 다행이고, 사상과 문화의 중요성을 다 잊은 듯한 부박한 세태에도 다행이고, 그리고 사람과의 만남이 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제는 묻지도 않는 외곬의 영혼들에게도 다행입니다. 작년 봄부터 아홉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만남』은, 기질도 환경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엇갈림과 부딪침을 담은 대담집입니다.

나이를 먹고 세상살이에 익숙해지니 자꾸 비슷한 사람만 만나고 싶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저 조용히 넘기고 피할 생각만 하지요. 그게 ‘다름’을 인정하는 것인 양 합리화도 하면서.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려면 먼저 ‘다름’을 확인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사람과의 ‘만남’이란 그런 불편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의 만남은 보여줍니다.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역사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타자와의 만남은 가능한가, 어떤 주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녹록치 않은 주제들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경식은 병이 납니다. 그만큼 쉽지 않은 만남이고, 읽는 이에게도 공력이 필요한 만남입니다. 그리고 그 공력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참 좋은 만남입니다.

K가 이 처방전을 읽고도 책이고 사람이고 만나기가 싫달 수도 있기에 책 속의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학자란 시인이란 우는 사람이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씨들을 위해 대신 우는 사람이다.” 김상봉이 전하는 함석헌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음을 탄하기 전에 남을 위해 울 마음을 먹어야 할 겁니다. 남보다 먼저 울고 남보다 오래 운 뒤에 그때서야 외로워도 좋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위해 우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살 수 있다는 걸 고맙게 받아들일 때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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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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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회 (211.XXX.XXX.219)
만남이란 책을 구하여 읽어봐야겠네요 저도 저와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너무 불편을 느끼는 편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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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9 11: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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