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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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확실성

백운선

2006년 11월 10일 (금) 00:00:00

아래 인용된 글은 지금의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몇 달 뒤 방송된 저의 칼럼 내용 중 일부입니다.

“시간상으로는 분명 환해야 할 대낮인데도, 희뿌연 안개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망망대해를 쏜살같이 달려가는데, 정작 그 기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배에 타고 있는 느낌입니다. … 무엇보다도,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새 정부가 출범한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는데도 이 정부가 우리 사회를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끌고 가려는지, 그 구상을 확연히 알아볼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합니다.”

무엇인가 도무지 확실치 않은 당시 상황에 대한 저의 답답함을 이 지역 어느 방송사의 칼럼 프로그램을 통해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아니 그 뒤 상당 기간이 지나는 동안까지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이 불확실성의 안개가 걷혀 가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정부가 임기의 종반의 종반을 보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기대의 가닥들은 거의 다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불확실한 정황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불확실성의 확실함만이 확인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의롭고 효율적인 사회를 위한 '합리적인 개혁정부,' 국가적 갈등구조를 해결하는 '국민통합 정부,' 국민과 수평적·쌍 방향적으로 소통하는 '열린 정부,' 그리고 모든 국민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정부'가 되겠다던 이 정부의 처음 다짐을 지금의 현실과 대비해 보면, 이 불확실성의 체감은 더욱 확연해집니다. 이처럼 지속되어 온 불확실성은 결국 온 나라를 총체적 무력감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국가적 무력감은 단지 느낌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무력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한 핵실험으로 야기된 위기의 경우를 봅시다.
바로 우리 코앞에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전 국가가 그저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들리는 것은 거의 공론(空論)의 수준에 가까운 논쟁뿐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구조의 탓이 큽니다. 이번 사태의 큰 줄기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정책과 전략에서 우리 한국의 처지와 입장은 그리 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번 경우가 아니더라도, 미국이 개입된 안보 현안에 관한한 우리 정부의 교섭력이 극히 미미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북한의 핵 사태는 우리의 생존이 걸린 긴박한 사안이지만 이것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 그 명분은 북한 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게 하고 공고한 한미동맹을 유지하기 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문제는 핵실험의 단계로까지 악화되었고 미국은 여전히 우리의 비협조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포용정책의 공과나 효용성에대한 정치적 논쟁은 참으로 무의미합니다. 포용이든 강압이든 우리 정부의 의지로는 사태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 어려운 환경이 지금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요?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만일 지금의 정부가 일찌감치 이 불확실성의 안개를 걷어내고 좀 더 확실한 정책의지와 모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전망을 보여 주었더라면, 그래서 좀 더 확고한 국민적 합의기반이 만들어졌었더라면, …’그래도 과연 지금과 같은 국가적 무력감을 겪어야 했을까요? 그래도 과연 미국으로부터 ‘얕보기’에 가까운 대우를 받아야 했을까요?

얕보는 세력은 미국만이 아닙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민의 존중을 받아야할 정부의 권위가 극심하게 손상되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적 무력감은 국가적 비전에 대한 희망의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비단 안보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경제 상황, 부동산 문제, 공교육의 문제, 그리고 여러 민생 문제 전반에 걸쳐 희망을 품고 있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신 이 무력감의 역작용은 심각한 균열 구조로 표출되어 왔습니다. 각종 국가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대한 사안은 물론 사소한 것에 이르기 까지 도대체 의견일치와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정부의 그 어느 정책 결정이나 집행도 순탄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지 않습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임기동안에라도 이 정부가 국가적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출범 당시 스스로 내렸던 다음과 같은 다소 흥분어린 평가를 다시 돌아보고 다시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킨 2002년은 한국민의 역동성이 활화산처럼 분출된 한 해였다. 봄의 민주당 국민경선, 여름의 월드컵, 겨울의 대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국민의 힘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의 열기로 타올랐다. 특히 2002년 말 16대 대선에서 우리 국민은 젊고 역동적인 리더십을 가진 정치지도자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전전세대에서 전후세대로의 리더십 교체가 실현되었으며, 한국사회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역사발전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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