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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나라의 인종 갈등
-“ALM(아시아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방석순 2021년 04월 08일 (목) 00:00:23

​그곳은 원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것도 유럽인들의 착각에서 비롯된 지칭이지만)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드넓은 자연 속에서 꼭 필요한 정도의 사냥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1600년대 수많은 유럽인들이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찾아, 굶주림을 피해, 보다 잘 살기 위한 꿈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유럽 백인들의 본격적인 아메리카 개척이 시작되면서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노예로 전락하거나 학살당하거나 지정된 구역으로 내몰리며 땅을 잃고 말았습니다. 백인들의 수탈로 삶의 터전과 문화, 목숨까지 빼앗긴 것입니다.

​유럽 각국에서 모여든 백인들로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이 오늘의 선진 민주국가, 자유주의 나라, 초강대국 미국을 만들었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룬 눈부신 번영의 바탕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물론 흑인 노예들의 엄청난 희생이 깔려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노예선에 태워져 아메리카 땅에 끌려온 흑인들의 참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흑인의 자유를 지지한 북군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흑인의 인권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끈 워싱턴 대행진 이후에도, 2008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차별, 흑백 분규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 해 동안 코로나19와 함께 BLM(Black Lives Matter;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이 전 미국과 유럽을 태풍처럼 휩쓸었던 것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의 황홀한 이야기에 이끌려 남아메리카에서도, 아시아에서도 끊임없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이제 인종 분포에서 히스패닉계가 흑인을 훨씬 앞지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시아계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미국 인구조사국 통계에 따르면 백인이 약 2억 명(60.7%), 히스패닉계가 약 6천만 명(18.1%), 흑인이 약 4천4백만 명(13.4%), 아시아계가 약 2천만 명(5.8%)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인에게도 흑인에게도 타 인종들의 유입은 전혀 달갑지 않은 눈치입니다. 이웃해 살면서도 갈등과 분규가 끊이질 않습니다. ‘이민자의 나라’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텃세와 폭력과 살상은 선진 민주국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권 시위자들이 ‘BLM’에서 바꿔 든 구호
“ALM(아시아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지난달 14일 저녁 뉴욕 번화가에서 83세 한국계 할머니가 40대 전과자로부터 침과 주먹세례를 받아 실신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흘 후에는 20대 백인 청년이 애틀랜타 근교 마사지샵과 스파, 세 군데에서 총격을 가해 아시아계 6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이틀 후엔 백주에 뉴욕 한복판에서 백인 여성이 한국계 여성에게 “넌 여기 사람이 아니다. 공산주의 중국으로 돌아가라”며 욕설을 퍼부어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나중 욕설의 주인공이 20여 년 동안 상원의원을 지낸 유력 정치인 고 대니얼 모이니핸의 딸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29일 대낮 뉴욕 맨해튼에서는 65세의 필리핀계 여성이 마주 오던 흑인으로부터 “여기는 너희 나라가 아니다”는 비난과 함께 무차별 폭행을 당했습니다. 바로 옆 건물 보안요원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말리지 않았고, 쓰러진 여성을 밖에 둔 채 문을 닫아 걸었습니다. 모두 지난 한 달 동안 벌어진 사건들입니다.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증오범죄연구센터는 미국 주요 대도시에서 전반적인 증오범죄가 7% 줄어든 반면 유독 아시아계를 향한 범죄는 150%나 급증했다고 밝혔습니다. 뉴욕에서는 2019년 세 건에 불과했던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가 지난해 28건으로 폭증했습니다. 지금 미국 땅에는 약 750만 명에 이르는 우리 해외동포 가운데 가장 많은 250만 명 이상이 살고 있습니다.<2018년 말 기준> 그래서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강 건너 불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백인들의 뿌리 깊은 우월의식, 흑인들의 씻기 어려운 피해의식이 미국 사회 인종 갈등의 주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 주류세력인 백인들은 흑인들의 부상이 마땅찮고, 사회ㆍ경제적 약자인 흑인들은 그들의 입지를 위협하는 히스패닉과 아시아계를 경계합니다. 그러한 갈등을 조장해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국과의 무역분쟁에 불을 지르고,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원망을 중국에 쏟아냄으로써 엉뚱하게도 아시아계 주민들이 폭력의 타깃이 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물론 시진핑의 세계로 향한 영향력 확대 과욕, 홍콩과 위구르 주민에 대한 폭압 정책, '네 발 달린 건 책상 빼고 다 먹는다. 날개 달린 건 비행기 빼고 다 먹는다.'는 오랜 식습관 등이 중국에 대한 혐오감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시아 인종에 대해 자행되는 저열한 폭력은 이민자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못난 기득권자들의 비뚤어진 심술이자 횡포일 뿐입니다. 한발 앞서 들어왔을 뿐 그들 역시 원주민의 땅에 발을 들인 이주민들입니다. 오히려 원주민을 학대하고 학살하고 땅을 빼앗은 원죄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한발 늦게 꿈을 찾아 들어온 히스패닉,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괄시와 혐오는 그들의 원죄를 잊은 부당한 짓거리입니다.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에서 실의를 씹으며 살아가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면 과연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요. “그럼 여기가 너희 땅이냐?”

미국 땅에서 소수 인종들이 겪을 고통은 앞으로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 땅에 단단히 뿌리 내리는 길은 이전보다 더욱 품격을 갖추고 당당해지는 일일 것입니다. 주류사회에서 동떨어진 무리로 머물 것이 아니라 그 복판으로 진입해 활동폭을 넓히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앤디 김(뉴저지주), 메릴린 스트릭랜드(워싱턴주), 영 김(캘리포니아주), 미셸 박 스틸(캘리포니아주) 등 연방 하원에 진출한 한국계 인사들의 역할이 특히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이웃을 배려하고 앞장서 돌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1992년 불우한 이웃 흑인들을 도움으로써 인종 폭동의 위험을 극복했던 LA 한인사회가 남긴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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