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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아빠 찬스 그 이후
이동식 2021년 06월 11일 (금) 02:59:39

문벌과 학연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관리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홍문관에서 만드는 홍문록(弘文錄)에 뽑히는 것이 가장 합법적인 지름길이었다. 과거 급제자 가운데 문장과 학행이 뛰어난 신진들을 홍문관의 하급 관리들이 선정해서 상신하면 조정 중신들의 합동 회의인 도당(都堂)에서 이를 추인해서 홍문록에 등재하고 주요 인사정책 때 이 사람들에서 발령 내는, 말하자면 인재풀 시스템이다.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이른 1598년 3월 홍문록에 드는 인재를 결정했는데 7장의 추천장을 받은 이상신(李尙信)ㆍ이필형(李必亨)을 포함해서 4장의 추천장을 받은 조즙(趙濈)ㆍ윤훤(尹暄)ㆍ강홍립(姜弘立) 등도 홍문록에 올랐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전하는 선조실록에는 특별히 사관의 의견이 붙어 있다.

선조 31년 무술(1598) 3월 1일(병술)
도감에서 홍문록을 마감하다
“전날 도당에서 홍문록을 작성할 때에 애초에는 (추천장을) 5장으로 정하였는데 추천장을 다 모으고 나서는 1장을 감하여 4장으로 정하였다. 어떤 재상이 이를 극력 주장하였는데, 피혐(避嫌)할 만한 처지인데도 스스로 주장하였으니 참으로 염치를 모르는 비부(鄙夫)이다. 어떤 재상이란 바로 윤두수로, 윤훤의 아비이다.”

곧 윤두수(尹斗壽, 1533~1601)의 아들 윤훤(尹喧, 1573~1623)이 홍문록에 든 것이 아버지 윤두수의 주장에 따라 추천기준을 한 등급 낮추었기에 된 것이라며 사관이 재상의 이름을 사초에 올려 고발한 것이다. 말하자면 아빠 찬스라는 것이다. 그 이후 윤훤은 홍문관 부수찬, 이조좌랑, 동래부사, 황해도 관찰사 등으로 승승장구하다가 황해도 관찰사 때 압송되는 죄인을 후대한 혐의로 파직됐다. 그러나 1623년 3월의 인조반정으로 서인세력이 집권하면서 이듬해 인조의 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책봉을 성사시킨 공로로 노비와 땅을 받았고 1625년 대사간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문제는 이후에 생겼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관찰사이기에 방어군 최전방 지휘관을 맡게 된 윤훤은 곧 안주(安州)를 빼앗겼다. 평양성에서도 갑자기 징발된 군사들이 평소의 신분차별에 항의하며 도주하기 시작해 다 흩어지자 남은 병력을 선천으로 물렸다. 이 소식을 들은 후금군이 압록강 남쪽 조선의 제2방어선인 황주로 곧바로 쳐들어가자 이곳의 지휘관도 군사를 물려 평양과 황주의 두 중요한 요새가 싸움 한 번 하지 못하고 궤멸하였다.

그전 광해군 때에는 평안도 관찰사 박엽이 평안도를 잘 지켰는데, 인조반정 후 박엽이 처형된 다음에는 후임 지휘관들이 군사적 대비를 엉망으로 해서 싸움 한 번 못하고 평안도 황해도를 여진족 후금에 갖다 바친 것이다.

결국 윤훤은 나라를 적에게 그대로 내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강화도에서 곧바로 참수되는 형을 당한다. 당시 그의 형 윤방(尹昉, 1563∼1640)이 요직에 있었고, 조카 윤신지(尹新之, 1582~1657)도 부마였지만, 그들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의 책임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윤훤의 아들 윤순지(尹順之, 1591~1666)는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셨었지만 이 때문에 아버지 처형 이후 5년여 동안 조정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러다 5년 후 홍문관 부교리에 기용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피신시킨 후에 더욱 왕의 신임을 받는다.

그렇게 서인 세력이 안정되면서 당시 집권 세력은 광해군 때 편찬한 『선조실록』에 잘못이 많다며 1657년에 실록을 수정하는 기구를 만들고 윤순지를 실록수정청당상(實錄修正廳堂上)에 임명한다. 윤두수의 손자가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핵심이 된 것이다. 이들의 작업에 의해 『선조실록』의 윤두수가 비난을 받은 대목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다.

선조(수정실록) 31년 무술(1598) 3월 1일(병술)
도당이 《홍문록》을 살펴 권점을 하는데 날조가 많다

...《실록》을 살펴보면 ‘도당에서 추천장을 모으는 권점(圈點)을 하던 날, 처음에는 5장으로 한정하였는데 마침내는 4장도 아울러 기록하였으니, 대개 윤두수가 그의 아들 윤훤을 위하여 이 의논을 주장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잘못이다. 이때 두수는 탄핵을 받고 있었는데 그가 와서 도당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사신이 허위로 날조하여 모함하는 데 급급해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즉 당시 윤두수가 탄핵을 당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회의에서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해명인 것이다. 다만 실록이 날조가 많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송두리째 없애지 못하고 수정의견을 붙여놓는 선에서 보완한 것을 보면 역사 자체를 손댈 수는 없다는 인식이 엄정했기에 이 아빠 찬스 기록이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과연 윤두수가 아빠 찬스를 발휘했는지 아닌지를 지금 정확히 판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처음 선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으로서는 당대 재상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없는 사실을 날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실록의 수정으로도 윤두수의 행위는 완전히 해명되지 못하고 조선시대에 아빠 찬스를 발휘(?)한 당사자로 후세에까지 의심받게 된 것이다. 물론 그 후 아들의 행적이 꼭 무리해서 일찍 출세시킨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의 아들은 전쟁의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 참수를 당했고 그 여파로 그의 손자도 한참동안 관직을 떠나 있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과거에도 그랬고 현대에도 그렇지만 무리해서 승진시키고 출세시키는 것은 당사자는 넘어갈 수 있다고 할지 몰라도 꼭 뒤의 자손들에게 영향이 간다는 것이다. 또 올바른 행실을 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한 사례를 광초(狂草) 서예가로 알려진 황기로(黃耆老, 1521~1567) 등에게서 보게 된다.

최근 한 전직 장관의 회고록 발간 이후 아빠 찬스라는 말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400여 년 전 조선 시대 아빠 찬스 시도가 있었고 그것이 그 집안에도, 역사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을 보면 그 사건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묵직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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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미디어SR 논설위원, 전 KBS 해설실장 
KBS 베이징 특파원, 영화진흥위원회 비상임 감사 역임. 
저서 ‘온계 이해평전’, ‘시간의 마음을 묻다’, ‘책바다 무작정 헤엄치기’, ‘이동식의 걷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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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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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백 (115.XXX.XXX.251)
칼럼 흥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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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5 16: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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