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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싫은 날-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김이경 2008년 04월 12일 (토) 05:29:21
 
텔레비전을 보며 책을 흘끔거리는 건 출판사에 다니면서 생긴 버릇입니다. 하루 종일 원고를 보지만, 빨간 펜으로 돼지꼬리를 그리며 넘기는 것은 책 읽기가 아니라 제품 검사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책을 끼고 살면서도 책에 대한 갈증 혹은 강박은 여전히 남게 됩니다. 하지만 집에 와 막상 책을 펼치면 이번엔 눈이 활자울렁증을 호소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TV와 책의 동시상영입니다. TV를 켜놓고 킬킬대다가 맥 빠진 장면이 이어지면 무르팍의 책을 힐끔거리는 거지요. 익숙해지면 양쪽 다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절대 통하지 않는 책들도 있습니다. 이른바 권장도서 100선 같은 것. 소설도 이런 목록에 들어 있는 경우는 정색을 하고 읽어도 편치가 않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토마스 만, 버지니아 울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등이 그런데, 그래도 이들은 고유의 리듬에 익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독서에 속도가 붙고 나름의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책들이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같은 게 대표적이지요. 20세기 최고의 영문학 작품으로 꼽히지만 솔직히 몇 명이나 읽었는지 궁금합니다. 그 책을 읽기엔 제가 가진 호기심과 허영심이 턱없이 부족함을 깨달은 어느 날, 책에, 책을 둘러싼 지식인의 행태에 더럭 짜증이 일었습니다. 만약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라는 독특한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책에 아주 오래 신물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저자인 릭 게코스키는 옥스퍼드 영문학 박사를 받고 대학 강사 노릇을 하다가 희귀본을 사고파는 책장수로 변신한 인물입니다. 이 책을 보니 벌이가 제법 쏠쏠한 모양입니다. 책에는 『롤리타』, 『파리대왕』, 『호밀밭의 파수꾼』, 『율리시즈』… 등, 작품성으로나 유명세로나 빠지지 않는 명저들의 “아주 특별한 이력서”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명저들의 이력서는 생각보다 추레합니다. 원고가 처음부터 환영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고 출판사를 전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율리시즈』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외설 시비로 작가를 재판정에 세웠고, 남편 테드 휴즈에게 『거상巨像』을 헌정했던 실비아 플라스는 불과 7개월 뒤 냉담한 남편에 절망해 삶을 마감합니다.

가장 비극적인 경우는 『바보들의 연합』(한국어판 제목 『조롱』)의 존 케네디 툴일 겁니다. 단 한 편의 걸작으로 미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툴은, 그러나 생전에 자신의 ‘책’을 보지 못합니다. 게코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출판계의 멍청이들이 툴에 대항해 연합전선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이 멍청이들 탓에 툴은 수년간 원고를 쓰고 고치기를 되풀이하다가 서른하나의 나이에 황량한 벌판에서 자살합니다. 남겨진 원고는 괴팍한 그의 어머니 덕분에 죽은 지 십년이 더 지나서 책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은 퓰리처상을 받았고, 18개 언어로 번역되어 150만 권이 팔렸습니다. 저 같은 “돌대가리 출판인”들에겐 가슴 뜨끔한 에피소드입니다.

이런 뒷이야기만큼이나 재미있는 것이 게코스키가 슬쩍슬쩍 던지는 책에 대한 촌평입니다. 『율리시즈』에 대해 그는 “이보다 더 긴 작품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면서 “이 책은 독자를 지치게 만든다”고 덧붙입니다. 그의 솔직함은 출판역사의 신화가 된 해리포터 시리즈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적용되며, 애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마의 시』도 마찬가집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처럼 나 또한 『악마의 시』의 책장을 중도에 덮어버렸다”는 그의 고백에 위로받은 게 저뿐일까요?

게코스키는 책장수이면서 동시에 부커상 심사위원을 지냈을 만큼 인정받는 문학평론가입니다. 그러니 걸작으로 상찬 받는 책들에 대해 ‘난 끝까지 읽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마 그런 분방함과 기백이 있기에 강단을 박차고 나와 책장수 노릇을 하면서도 인정받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겠죠. 책이 의무와 관조의 대상에서 벗어나 수집과 열광의 대상이 되려면 출판계에 이런 분방함과 기백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저자라 해도 “선생님, 이건 지난번 책의 재탕인데요. 잠시 절필하시죠”라고 말해줄 출판인, 대가의 이름값을 인정하지 않는 정직한 평론가, 한 권의 실패를 곱씹지 않는 너그러운 독자, 걸작은 그들 속에서 나옵니다. 거기에 게코스키 같은 전천후 책장수까지 있다면 책 읽는 재미가 두 배로 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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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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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h1878 (211.XXX.XXX.242)
책을 잡으면 몇날 몇칠이 아니 때로는 한 달이 지나도 책 한 권을 독파하기 힘이 드는 저에게는 위안이 되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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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2 14: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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