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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장한나
임철순 2008년 04월 15일 (화) 00:19:37
토요일이었던 4월 5일 오후,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포스코 창립 40주년 기념음악회에 다녀왔습니다. 26세의 첼리스트 장한나와 72세의 가야금 명인 황병기가 만난 무대입니다. 서로 친구라고 말하고 있는 이 노소/남녀의 동락은 새 봄맞이 음악회로서 적절해 보였습니다.

레퍼토리는 비발디의 <첼로와 현,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E플랫 장조 RV 408>과 황병기의 가야금협주곡 <새 봄>, 베토벤의 6번 교향곡 <전원>이었지만, 실제로 이 음악회는 지휘자 장한나의 독무대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맨 처음 비발디를 연주할 때, 장한나는 앉아서 첼로를 켜면서 눈으로 몸짓으로 지휘를 했습니다. 천재들의 표정은 원래 저런 것인가, 연주자들을 노려보는 눈이 무서웠습니다. 그 표정이나 눈빛은 피 말리는 승부처에 이른 프로기사 이세돌9단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금파리 같은 날카로움과 잘못을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이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 황병기의 협주곡. 한복 차림의 황병기는 5개 악장으로 된 <새 봄> 연주를 마치고, 불려 나온 소처럼 순한 눈과 표정인 채로 무대에 서서 장한나를 쳐다보며 그의 지휘에 따라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갔습니다.

마지막이 베토벤 6번이었는데, 무대를 정리하는 동안 장한나는 전원교향곡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베토벤의 작품 중 유일하게 조용히 끝나는 음악이라고 소개하면서 “나는 쉽게 음악에 빠져든다”, “음악을 들으면 어깨춤이 절로 난다”고 말할 때의 장한나는 장난이 깃든 평소의 밝은 얼굴이었습니다. 우리 말보다 playful이라는 영어단어가 먼저 생각났습니다. 장한나를 처음 본 것은 거의 10년 전인데, 그 때의 어린 표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을 연주할 때 장한나는 다시 달라졌습니다. 가냘프고 여린 몸매이지만, 잔뜩 구부린 채 팔을 늘어뜨리고 지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무대와 아주 가까운 자리에 앉았으면서도 연주모습을 보여주는 대형 스크린을 무대만큼 자주 쳐다봤습니다. 지휘를 하는 장한나는 고통 열락 절정감, 이런 여러 표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눈을 치뜬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얼굴, 고통스러운 듯 잔뜩 찌푸린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얼굴 이런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사실 나는 연주회를 볼 때 지휘자의 표정이 늘 궁금했습니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리사이틀 홀에는 무대 뒤쪽에도 좌석이 배치돼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뒤에서 지휘자를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아직 거기에 앉아 본 적은 없지만 그 좌석에서는 지휘자의 몸짓은 물론 표정이 손에 잡힐 듯 잘 보일 것 같습니다.

장한나가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지난해 5월 27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회 성남 국제 청소년 관현악축제 에서였습니다. 가 보지 못했지만 한국 중국 독일의 청소년 교향악단 단원들로 구성된 연합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장한나의 솜씨는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첼로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장한나는 왜 굳이 지휘를 하는 것일까. 포스코 연주회 전후의 인터뷰를 종합하면, '음악은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장한나는 100명의 연주자가 하나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좋고 연주자들과 교감하면서 `나만의 음악`이 아니라 `우리의 음악`을 만들어 가는 게 행복하다고 합니다. 지휘를 하면서 작곡가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게 돼 자연히 첼로 연주도 깊어졌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하고 싶은 때 지휘를 더 할 것이라는 장한나는 "지휘는 나이로 하는 게 아니라 음악적 의사소통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 장한나는 첼리스트나 지휘자에 한정되지 않고 '음악가 장한나'로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시향 상임지휘자인 정명훈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고도 지휘로 길을 바꾼 경우입니다. 그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늘 갈등을 겪었다는데, 가끔 지휘봉을 놓고 피아노연주를 해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도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악에서 지휘는 2인 이상 연주자의 앙상블을 정돈하고 해석을 통일하는 행위라는 게 사전의 정의입니다. 노래나 연주가 예술적으로 조화되도록 앞에서 이끄는 일이라고 정의한 것도 있지만, 이 정의는 좀 재미없습니다. 해석을 통일하는 행위란 바꿔 말하면 지휘자의 생각으로 음악을 재창조하는 것이며, 교감을 넘어 연주자들을 지배하는 행위입니다. 좋은 음악가는 자신의 연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악기와 손을 빌려서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장한나의 생각입니다.

모든 악기에는 음악이 들어 있습니다. 10여 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어떤 외국여성의 피아노독주회를 볼 때의 일입니다. 연주자가 누구였는지 지금은 잊었습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건반 속에 들어 있는 음들이 손가락을 튕겨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피아노 속에 있는 음들이 손가락을 끌어들여 이 건반을 누르게 하고 이내 저 건반으로 옮겨가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건반의 반탄력에 놀라면서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 속에도 당연히 음악이 있습니다. 좋은 지휘자는 그걸 잘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날 몸을 잔뜩 구부린 장한나는 땀을 흘리며 열정적으로 지휘했습니다. 그녀의 지휘 모습은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거예요, 바로 그거. 거 봐요, 거기 있잖아요? 그 속에 음악이 있잖아요. 어서 더 내놔요, 더 내놔."

정현종의 짧은 시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게 있습니다. 이 시를 표절하면 장한나의 생각은 '사람들 속에 음악이 있다/ 그 음악을 꺼내고 싶다' 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기는 이것이 장한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지휘자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토벤과 칼 뵘이 지휘하는 베토벤은 서로 같지 않고 음색과 연주시간도 판이합니다. 하지만 카라얀이든 뵘이든 사람마다 그 속에 음악이 있으며 그 음악을 이끌어 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카라얀은 22세, 로린 마젤은 겨우 8세에 지휘자로 데뷔했다고 합니다. 장한나는 오히려 늦은 셈입니다.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닌 장한나가 첼로에서 그랬듯이 지휘자로서도 대성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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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분순 (211.XXX.XXX.129)
2008년 4월 18일 [금] 오후 08:45
임주필님, 감동적인 글 쓰시는 일은 여전하시군요. 제주도, 전라도 등지로 여러 날 문학행사 겸 봄나들이 돌아오느라 오늘 밤에야 읽고 빙긋 웃었습니다. 어쩌면 마음에 꼭 드는 글만 쓰시는 건지, 놀라면서요. 글 읽으면서 무척 즐거웠구요.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ㅡ 한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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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9 16: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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