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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블루베리 농부입니다<3>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연
함인희 2021년 09월 24일 (금) 00:11:54

서너 해 전, 9월 중순 즈음으로 기억됩니다. 60대 초반의 여성 한 분이 저희 농장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습니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던 그분은 “지금 생블루베리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수확 끝난 지 두 달이나 지났습니다.” 했더니 “그럼 얼려놓은 건 없나요?” 묻더라구요.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요?” 했더니 당신 딸이 얼마 전 임파선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제 겨우 스물여덟 생일을 지났다는데...

가망 없다는 건 알지만 몸에 좋다는 건 모두 먹여보고 싶은 마음에 친지 소개를 받아 물어물어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블루베리가 말기 암환자도 살리는 만병통치약은 당연히 아니지만, 엄마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식구들 먹으려고 쟁여둔 것, 정품(正品)이 아니라 알도 작고 맛도 시큰할 텐데 괜찮으면 가져가시라”며 한 보따리 챙겨 드렸습니다. “얼마를 드리면 되겠냐”며 지갑을 뒤적이던 분, 손사래 치며 그냥 보내드렸지요. 요즘도 가끔씩 “집에 중환자가 있는데 생블루베리 구할 수 있겠느냐?”는 전화가 오곤 합니다. 그때마다 딸을 가슴에 묻었을 엄마의 수심 가득했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답니다.

본의 아니게 가족의 민낯과 마주칠 때도 있습니다. 한 번은 이모님과 제가 함께 스승으로 모시는 명예교수님께서 당신 딸들에게 블루베리를 선물로 보내고 싶다시며 주문을 해오셨습니다. 한데 그만 두 딸의 주소를 바꿔 보내셨다는 겁니다. 내용물이 같으니 상관없지 않으냐고 여쭈었더니, 실은 자매가 말도 섞지 않으려 한 지 오래라 이만저만 난처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수님 한숨에 주인장이 직접 해결사로 나섰습니다. 두 따님에게 각각 전화해서 아버님 실수가 아니라 농장의 실수로 주소가 바뀌었으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달라구요.

또 한 번은 어떤 어머님이 당신 두 아들과 딸에게 선물로 보내고 싶다시며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들딸네 집 주소는 모르고 전화번호만 알고 있으니 농장에서 직접 주소를 물어 보내 달라는 겁니다. 갑자기 여러 생각이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길래 어머님이 자식들 주소를 모르나, 당신이 직접 물어서 알려주어도 될 텐데 왜 굳이 농장에서 직접 알아보라고 하나, 행여 어머님이 보내는 선물이라고 거절하면 어쩌나 등등이요.

고객의 부탁이니 난처함을 무릅쓰고 전화를 해서 “어머님 선물인데 배송받을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세 자녀 모두 하나같이 ‘고맙다’든가, ‘뭐 그런 걸’이라든가, ‘안 받겠다’든가 군소리 한마디 없이 자신들 집주소를 알려주더라구요. 차라리 안 주고 안 받는 것이 낫지, 받을 건 받겠다는 심보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말 못할 사연은 대체 무엇일지, 아무튼 포장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기억이 나네요.

전화기 너머로 2kg짜리 세 박스를 주문한다는 예쁜 새댁 목소리가 들리길래 “시댁과 친정에 선물하는 건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순간 후회했습지요. 그냥 “아니요”라고 하면 될 것을 “요즘 어떤 며느리가 시댁에 선물을 하나요?” 되묻기까지 하더라구요. 그러려니 넘겨도 좋을 사소한 말 한마디에 점심 먹은 후 소화제 한 알을 삼켰던 걸 보면, 저도 어쩔 수 없는 ‘꼰대’세대임이 분명한 듯합니다.

저희 농장 주위엔 세종시가 개발되면서 원래 살던 마을인 월산리를 떠나 이주해온 분들이 다시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떠나올 때 꽤 두둑한 보상비를 챙겼답니다. 한데 지금은 달랑 집 한 채만 남고 빈털터리가 된 분들이 또 대다수랍니다. 사업자금 달라고 손 벌리는 자식들 외면할 수 없어 그리되었다네요.

그 바람에 70대 후반~80대 초반 할머니들께서 다시 일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답니다. 블루베리 발음조차 어색한 할머니 두 분이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여 저희 농장에 나오신 적이 있습니다. “과일 다 거기서 거기여. 복숭아(조치원은 복숭아로 유명한 것 아시지요?) 따듯 하면 되는 겨.” 하시며 채 익지도 않은 빨간 열매를 마구마구 따시는 바람에, 죄송한 마음 뒤로 한 채 출근 첫날 “내일부턴 안 나오셔도 됩니다.” 하고 해고 통지를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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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미 에모리대대학원 사회학 박사. 이화여대 사회과학대학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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