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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반지(斑指)
박종진 2021년 10월 14일 (목) 00:17:04
파커51 (초기산은 캡링의 흔적이 있었지만 나중 것은
사진처럼 캡링이 없다.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이면서 권위, 충성을 상징하는 그 반지 맞습니다. 갑자기 웬 반지 타령이냐고요? 만년필에도 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년필 뚜껑을 보면 금속으로 한 바퀴 돌린 것을 만년필 계에서는 캡밴드(cap band) 또는 캡링(cap ring) 이라고 부릅니다. 갖고 계신 만년필이 있다면 함 꺼내보세요. 못 찾겠다고요?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한 개가 아니고 두세 개 된다고요? 그런 것도 있습니다. 값을 꽤 주고 사셨다면 반지는 반드시 있을 겁니다. 선물 받았는데 뚜껑에 반지가 없다고요? 그렇다고 실망하진 마십시오. 예외는 늘 있고 그 만년필이 명작(名作)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지가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만년필의 황금기가 열리는 1920년대부터입니다. 그 전까지 각 회사들은 돈을 더 받기 위해서 금이나 은 또는 진주조개와 전복껍데기를 잘라 장식(裝飾)을 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만년필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회사들의 개성은 없었습니다. 꽤나 긴 기간인 약 40년 동안 “아 저건 정말 특별하다.” 하는 것은 다섯 개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서로서로 비슷했습니다.

반지의 특별함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파커였습니다. 1921년에 파커가 출시한 듀오폴드(Duofold)는 여러모로 특별한 펜이었습니다. 빨강의 몸체에 검정색을 위와 아래로 배치, 만년필 세계에 컬러시대를 열기도 했지만 맨 처음 것은 뭔가 허전했습니다. 1923년 파커는 ‘골드거들(Gold Girdle)’이라 이름 짓고 반지 하나를 뚜껑에 끼웠습니다. 이것은 기막히게 어울렸고 듀오폴드는 비로소 완벽해졌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파커가 반지를 가장 먼저 끼운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반지는 초창기부터 있었고 파커가 그 중요성을 맨 처음 인식했다는 것이지요. 이름 있는 반지의 처음입니다.

 
(좌) 1920년대 초 파커 듀오폴드 광고 (No Cap Ring) / (우) 1920년대 중반 파커 듀오폴드 광고(One Cap Ring)

이 첫 번째 반지는 1928년까지 유행했습니다. 유행했다는 것은 파커는 물론 파커의 둘도 없는 경쟁자였던 셰퍼, 당시 가장 큰 만년필 회사인 워터맨도 반지 한 줄은 기본으로 끼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1928년 에버샵 카탈로그 (Deco Band)

1928년에 두 줄 반지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파커와 에버샵의 최고급 신제품은 반지가 더 많았습니다. 이것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명 ‘데코밴드(Deco Band)’라 불리는 에버샵의 반지였습니다. 데코밴드는 가운데가 굵고 위와 아래는 가늘었는데, 가운데에는 그리스 열쇠(Greek Key)라 불리는 문양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이 반지가 제가 찾은 두 번째의 반지로 모든 아름다운 반지의 시작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반지가 미국에서 등장했다면 세 번째 반지는 독일에서 나왔습니다. 만년필 사업이 미국에 비해 늦었던 독일은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개발된 것을 가져다 쓰기 급급했지만 1920년대 후반이 되면 그 격차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1992년 몽블랑 작가 시리즈 한정판
헤밍웨이의 마이스터스튁 캡링

 예를 들면 미국에서 1913년 등장한 레버필러는 독일에서는 약 10년이 지난 1920년대 초반에 등장하고, 1924년 미국에서 대유행하기 시작한 플라스틱 재질의 만년필은 4년 후 독일에서 생산되고, 심지어 1929년 펠리칸이 만년필을 만들며 내놓은 잉크충전방식은 미국보다 2년이나 빠르기까지 합니다. 캡에 있는 반지 역시 마찬가지여서 두 줄 반지가 미국에서 1928년 유행하면 1년 후면 독일 만년필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1937년 몽블랑은 최고급 라인인 마이스터스튁 129를 출시하는데 이 만년필은 세 줄의 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애버샵의 데코밴드처럼 위와 아래는 가늘고 가운데가 굵은 반지였지만 가운데가 살짝 돋으라져 있고, 그곳엔 문양 대신에 '몽블랑 마이스터스튁(MONTBLANC-MEISTERSTUECK)'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 독특한 시도는 독일 몽블랑이 처음 이었습니다. 1938년 후속인 마이스터스튁 139로 이어졌고, 1940년대 말 마이스터스튁 140시리즈를 거쳐 약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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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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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현 (39.XXX.XXX.49)
장식 너무 과하면 오히려 매력을 반감시킬 수 있는데 단순해보이지만 만드는 사람은 많은 궁리와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친 것 같습니다. 덕분에 소비자들은 한 눈에 반할 수 있는 멋진 만년필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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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4 13:59:48
0 0
계속하기 (175.XXX.XXX.126)
펜촉부터 몸통, 그리고 반지에 이르기까지 만년필의 모든 부품들은 끊임없이 발전하는것 같습니다. 앞으로 반지가 어떻게 변해갈 지 기대가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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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15:38:26
0 0
박종진 (211.XXX.XXX.243)
맞습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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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07:54:15
0 0
차상욱 (112.XXX.XXX.86)
반지만년필이라고 하니 몽블랑의 웨딩만년필이 생각 나네요.
몽블랑은 마케팅을 참 잘하는 메이커라고 생각이 듭니다.
초기의 반지링의 갯수로 만년필의 등급을 알려주기도 했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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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1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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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반지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 웨딩링 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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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07: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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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118.XXX.XXX.97)
실용성은 물론 아름다움도 갖추려 노력한 만년필의 역사를 지금도 149로 지금도 확인할 수 있군요.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변하지 않은 우아함이 캡 밴드에 남아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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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0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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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공존하고 있어 만년필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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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07: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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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106.XXX.XXX.37)
만년필에 끼워지는 반지가 더욱 빛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있다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군요. 차라리 없는 것이 어떨 때는 더 멋질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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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08: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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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그럴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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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07: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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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빈 (203.XXX.XXX.45)
글 잘 읽었습니다. 반지에 그런 의미가 들어 있군요.
제 만년필에 대해서 자부심을 더 갖게 되었습니다.
제 만년필은 몽블랑 마이스터스틱 149라고 되어 있는데, 몇 년도 모델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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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08:09:10
0 0
박종진 (211.XXX.XXX.243)
현존 최장수 만년필인 몽블랑 마이스터스튁149는 1952년부터 출시 되는데요. 자세한 연도 구분은 실물을 봐야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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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07:48:18
1 0
백리금 (39.XXX.XXX.50)
개인적으로는 무늬가 있는 데코밴드가 참 아름답네요.
네 번째, 다섯 번째 반지는 아떠할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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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07: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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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멋진 댓글입니다. 저도 그 반지들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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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07:45:19
0 0
단석 (175.XXX.XXX.94)
절대 반지가 떠오르는 글입니다
좋은 글 구경 잘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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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4 07:3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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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절대 반지가 떠올랐다면 대만족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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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07: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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