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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장난으로 단수된 관광단지
최창신 2008년 04월 17일 (목) 04:44:50
걸어서 탐라(耽羅) 일주(5)

월림리를 지나 저지리(楮旨里)를 통과할 무렵 날씨가 끄무레해지더니 눈발이 날렸습니다. ‘별일도 다 있다’ 싶었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던 끝물 추위를 내가 몰고 내려왔나?

   
  ▲ 열대풍의 제주 섬에도 때때로 세찬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맑은 날 멀리서 올려다 본 한라산은 머리에 하얀 눈을 쓰고 있어 더욱 신비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때 아닌 눈의 기습공격으로 나라 전체가 휘청, 다운될 뻔했다는 것입니다. 저녁에 숙소에서 본 TV 뉴스. 집중 강타를 당한 영동지방은 폭설로 마비가 돼버렸고, 서울도 복부를 제대로 맞아 한동안 얼굴이 핼쓱해졌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 그렇다면 제주도는 약과였군!

계속 걸으면서 도로표지판에서 ‘저지리’라는 마을이름을 읽을 때마다 그 발음 때문에 이상한 생각이 다양하게 떠올랐습니다. 사실 ‘저지리’라는 말은 좋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楮)는 ‘그 껍질로 종이를 만들 수 있다[皮可爲紙]’ 하여 닥나무라는 의미이고, 지(旨)는 뜻·아름다움·맛을 뜻합니다. 이를 합하면 아름다운 닥나무마을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다르게 읽혀집니다. ‘저질이’·‘지지리’하는 식으로. 아울러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의 이미지까지 떠오릅니다. 아마도 오래 걷다 보니 너무 심심하여 장난기가 발동했나 봅니다.

저지리의 파출소 바로 옆집은 말고기음식 전문식당. 말고기를 먹는다는 말은 들은 바 있으나 실제로 식당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흥미가 동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말고기는 기본이고 ‘말 갈비’ ‘말 육회’도 즐길 수 있다 합니다. 아니, 육회로도?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으므로 호기심을 억제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조금씩 쉴 때나 편안히 걸을 때면 지도를 열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길을 잃지 않으려는 게 목적이었지만, 마을이름이 대체로 특이하거나 재미있어서 점점 빠져 들어갔습니다.

협재리라는 곳에는 ‘개느리’(느림보 개가 살았나?) ‘개빼’(개 뼈를 모아 묻어 두었는가?) ‘개오기’(개도 오기를 부리나?) 등 개에 관한 이름이 많았고, 저지리를 지나면서는 ‘광털’ ‘아래털’ ‘웃털’이 차례로 위치해 있었습니다. 세상에 ‘털’이라는 이름의 지명이 있는 것 자체가 웃음을 자아내게 했는데 한 군데도 아니고 세 군데라! 그 중에도 ‘아래털’은 국도가 X자로 교차하는 지점에 있어 묘한 연상작용까지 불러일으키니 그 배경이 궁금했습니다.

재미있어서 자꾸 들여다보다가 또 묘한 이름들을 발견했는데 ‘왓’으로 끝나는 지명이 의외로 많은 데 놀랐습니다. 지나온 길 주변만 살펴보아도 따리왓·최선이왓·양지왓·수머리왓·막새왓·끌왓·골딩왓·앞쉬왓·앞케왓·숭굴왓·사림왓·시구왓·관솔왓 등으로 부지기수였습니다.

‘아마 왓이라는 말은 동네 혹은 마을이라는 뜻일 거야. 규모가 좀 작은 마을이름이겠지’ 하면서도 막연한 짐작으로는 의문이 풀리지 않아 김창완 국장에게 물었더니 ‘밭’이라는 말이라고 알려줬습니다.(사실은 김 국장도 서귀포의 본가에 전화로 확인하여 알게 됐지만.)

   
  ▲ 밭 이름에서 유래한 듯한 제주의 마을 이름이 정겹습니다. ‘수머리왓, 막새왓, 앞수왓’이 있는가 하면 ‘샘이밭, 존섭밭’도 있습니다.  
 
반면 같은 지역에 샘이밭·존섭밭 하는 식으로 ‘밭’으로 끝나는 지명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훈민정음 창제 때 있다가 없어진 3개의 글자들 가운데 하나가 미친 영향으로 금방 이해가 되었습니다.

중간목표 지점 대정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관광으로 유명한 중문(中文)까지 또 다시 30km를 더 걸었습니다. 하루에 60km를 걷게 된 셈이어서 자연스럽게 강행군이 돼 버렸습니다. 마지막 10km 구간에서는 두 발에 모두 현저한 고통이 느껴져 힘들었습니다.

중문의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발을 점검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양쪽에 밤톨만한 물집이 잡혀 있었습니다. 작은 것도 두 개 더 있었습니다. 빨리 씻고 직접 치료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관광지라는 데가 뭐 이래.’ 지배인에게 따졌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간 지 한참 만에 되돌아와서 하는 말이 걸작 중의 걸작이었습니다. “시청 직원이 장난하느라 뭘 잘못 만져 이 일대가 모두 단수되었습니다. 언제 물이 나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씻지 못하는 거야 참을 수 있겠으나 발의 손질은 어찌 하나? 시청직원은 무슨 장난을 했나? 잘못된 걸 알았으면 왜 냉큼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하나? 여기가 관광단지 맞지?’

너무도 어처구니없어 천정만 바라보았습니다. 물집을 치료하고 자야겠는데. ‘치료’라고 해봐야 소독약도 없어 바늘로 그냥 찌르고 실을 끼워 놓은 상태로 물을 제거하는 것. 생각처럼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씻지도 못한 손으로 꾹꾹 눌러 물을 빼고는 붕대로 감았습니다. 내일은 괜찮을까? 장난치다 단수시킨 직원은 두 발 뻗고 편히 잠들었겠지.

최창신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다.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태권도신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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