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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은 없다
박종진 2022년 01월 12일 (수) 00:03:24

잘 쓴 글씨란 뭘까? 지금도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글씨는 멀었고,

 
스트레이터 홀더 초창기 만년필의 모습  

어떤 글씨가 잘 쓴 글씨인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물론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 등 반듯하게 쓴 해서(楷書)는 알아 볼 수 있지만, 어찌 서예의 세계가 해서만 있나요? 진시황 때 만들어졌다고 하는 인장(印章)에서 볼 수 있는 전서(篆書)가 있고, 전서 다음 만들어진 예서(隷書), 획을 줄여 쓴 행서와 초서 등이 있습니다. 그밖에 금문, 갑골 등등… 저는 해서와 전서의 교과서 중 고작 서너 개 정도를 써봤으니 서예 실력은 입문(入門) 단계입니다. 하지만 초보가 궁금한 것은 더 많은 법. 작년 그 유명한 호태왕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줄여서 호태왕비 또는 광개토대왕비)를 막 시작할 때입니다.

“선생님, 어린애가 쓴 것처럼 비뚤배뚤한 호태왕비는 잘 쓴 글씨인가요?” 솔직히 저는 호태왕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생각할 뿐, 잘 쓴 글씨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잘 쓴 글씨 맞습니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당대 최고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붓을 잡고 “너무 반듯하게 쓰면 호태왕비체의 맛이 나지 않습니다. 나뭇가지나 사람의 팔뚝 그 어디 봐도 직선은 없습니다. 이렇게 구불텅한 자연스러운 글씨가 잘 쓴 글씨입니다.” 말씀 전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저는 머릿속에 숭례문(崇禮門)과 네모난 고층빌딩이 떠올랐습니다.

1929년 셰퍼는 위와 아래가 점차 곡선으로 가늘어지는 최초의 유선형 만년필인 밸런스(Balance)를 출시합니다. 만년필은 1883년 실용적인 워터맨 제품 이후 줄곧 곧은 막대 모양이었습니다. 뚜껑이 뾰족한 테이퍼 캡(taper Cap) 만년필이 있었지만 잠시였습니다. 이름 자체가 곧은 것을 의미하는 스트레이트 홀더(straight holder)와 이것에 뚜껑이 살짝 커진 콘캡(cone cap)이 만년필의 모양을 주도했습니다.

 
  1930년대 초반 셰퍼 밸런스

그런데 왜 셰퍼는 50년 가까운 오랫동안 유지된 모양을 버리고 판을 깨는 유선형 만년필을 내놓았을까요? 더군다나 셰퍼는 파커와 더불어 가장 잘 나가던 회사였습니다. 여러 설(說)이 있지만 균형을 뜻하는 이름처럼 회사의 의도는 펜을 잡았을 때 손 안에서 균형을 이루어 빠르고 편안하게 글씨를 쓸 수 있게 만들어졌고, 이것은 1930년대로 가기 위한 회사의 새로운 먹거리였습니다.

이 새로운 만년필은 성공했습니다. 파커와 월 에버샵이 따라하여 유선형 만년필을 내놓았지만, 이것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급하게 따라한 결과 곡선이 자연스럽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필요했고 1931년 월 에버샵은 도릭(Doric), 파커는 1933년 버큐메틱(Vacumatic)을 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경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경쟁자들이 쫓아오자 셰퍼 역시 밸런스를 다듬어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구슬 모양이던 클립의 끄트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고 밀착하여, 밸런스는 한층 더 완벽한 유선형에 가까워져 유선형의 주인은 영원히 셰퍼의 것이 되는가 싶었습니다.

 
몸체가 주름진 워터맨 헌드레드 이어의
1940년 광고
 

하지만 권세가 길어도 십년을 넘기기 어렵다고, 1939년이 되자 새로운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워터맨이었습니다. 워터맨 역시 지난 십년 간 새로운 만년필을 계속 발표하고 있었지만 유선형엔 소극적이었습니다. 매출은 계속 떨어졌고 워터맨은 더 이상 일류(一流)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도약하길 원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펜이 헌드레드 이어(Hundred Year Pen)였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새로운 재질 루사이트로 만들어진 헌드레드 이어는 이전의 워터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한 유선형이었습니다. 하지만 열 발산을 위해 만들어진 주름진 외관이 어색하여 이 만년필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유선형 만년필로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은 1941년에 등장한 파커51였습니다. 수년간의 연구와 막대한 자금을 들여 만든 파커 51은 여러모로 뛰어났지만, 물에 빠지면 금방 헤엄칠 것 같은 돌고래 같은 유선형의 몸체는 특히 아름다웠습니다. 파커 51은 만년필 역사상 유례없는 큰 성공을 했고, 현대 만년필 시작이라는 타이틀까지 갖게 됩니다.

   
  (좌) 1940년대 파커51 광고 (우) 2002년에 1,000개 한정 생산된 Pelikan 'Spirit of Gaudi'-차상욱 사진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가 이런 말을 했다죠 "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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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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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준 (223.XXX.XXX.70)
결국 자연스러워보이는 곡선이 아름다운 이유가 있네요.
글을 읽다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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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6 06: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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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118.XXX.XXX.68)
산이나 바위도 세월이 지나면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 자연스러워 보이듯, 만년필도 유선형이 나온 것은 필연적인 진화의 일부려니 합니다. 부유층이나 살 수 있었던 고급 오버레이 모델뿐만 아니라 일반 모델에도 디자인 감각을 적용한 일종의 ‘아름다움의 대중화’를 꾀한 것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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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14: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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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0.XXX.XXX.241)
“진화의 한 과정” 저도 동감합니다. ^^ 앞으로는 어떤 진화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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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18: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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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 (175.XXX.XXX.86)
각진 직선형의 만년필도 오랫동안 쓰다보면 그 각이 뭉퉁해지지 않을까, 유선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오늘도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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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11: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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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0.XXX.XXX.241)
아마 그럴지도요^^ 갖고 계신 만년필과 오래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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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18: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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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욱 (112.XXX.XXX.86)
필기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글씨를 잘 쓰고 싶어 합니다.
저도 그 사람들 중에 한사람입니다. 새로 산 필기구로 노트에 글을 쓰며
나름의 평가를 하는 것을 즐기지요. 특히 만년필을 쓸때가 제일
좋습니다. 저도 최고의 필기구인 붓으로 쓰는 것을 배우고 싶은데 시간이
되지 않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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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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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0.XXX.XXX.241)
언제가 기회가 올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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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18: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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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 (175.XXX.XXX.94)
동서양이 다르다고 하지만 끝은 다 하나로 통하는게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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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09: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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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0.XXX.XXX.241)
결국 마주 하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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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18: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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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이 (39.XXX.XXX.64)
자연히 발생하는 강물이 굽이쳐 흘러내리듯, 나무가 마냥 올곧게만은 자라지 않듯 자연물은 곡선을 사랑하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자연스러운 곡선이 더 눈을 끄는 듯합니다. 재미난 내용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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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0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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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0.XXX.XXX.241)
밸런스가 왜 나왔을까? 오래토록 궁금한 문제였습니다. 결국 아름답게 진화하려고 등장한 것이라고 저는 답을 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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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18: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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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106.XXX.XXX.197)
뭐니뭐니해도 사람은 결국 곡선 등 근원적인 자연스러움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나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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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07: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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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0.XXX.XXX.241)
만년필은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음 필기구 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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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2 18: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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