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ㆍ20 동지회와 일념비(一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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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ㆍ20 동지회와 일념비(一念碑)

황경춘

2008년 04월 23일 (수) 03:28:37

“황형, 오늘 모이는 디는 외환은행인디, 로비가 아니라 바깥에 있는 쉼터야.”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억양의 귀에 익은 선배 목소리였습니다. 남쪽에서 북상하는 개화선이 마침내 서울에 도착해 주말엔 벚꽃 축제가 열린다고 신문이 전한 화창한 봄날의 목요일이었습니다.

얼마 전 <80에 耳順>이라는 글로 소개해 드린 80대 후반 늙은이 네 사람의 모임 이야기 계속입니다. 우리는 주로 종로 탑골공원 근처의 음식점이나 명동 입구에 있는 외한은행 본점 로비에서 만납니다. 은행 용무도 없이 로비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남 보기 그렇다고, 작년에 米壽(미수)를 맞이한 교육계에서 한 평생을 보낸 선배는 탐탁찮게 생각하시지만 “아니 나도 외환은행 주주 한 사람인데 뭐가 어때” 하며 용인에서 올라오시는, 군 출신으로 만사를 씩씩하게 추진하는 선배가 굳이 우겨 이곳을 많이 이용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여름에는 냉방시설이, 겨울에는 난방시설이 잘 가동되어 쾌적한 모임 장소인 이곳에는 우리 말고도 점심시간에 약속 상대를 기다리는 노인네들이 많습니다.

지난 연말부터인가 은행 앞 큰 길에 한동안 새로운 포장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연도 말에 구청 예산이 또 남아도는 게구나” 하고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사는 흔히 보는 날림 공사가 아니고 길 한복판에 아담한 분수대까지 만들고 차도와 보도를 값진 석재로 단정하게 포장하는 본격적 공사였습니다.

몇 달 뒤 끝나고 보니 보행에 불편하던 턱이 적어지고 은행 바깥 쉼터에는 곱게 칠한 삼각형 나무 벤치를 여기저기에 비치하고 가운데엔 작은 나무들과 고운 잔디로 단장하는등 애쓴 흔적이 역력히 보여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공공 공사였습니다.

우리가 가는 음식점에서는 자주 오는 우리를 알아보고 식후에 커피 서비스를 해주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갔던 집엔 이 커피 서비스가 없어 식후에 우리는 이 쉼터에 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로비 안 자판기에서 뽑아 온 350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계속했습니다.

이 날 맨 나중에 도착한 성북동 선배는 이 아름다운 잔디를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으며 “이 잔디로 일념비 주위를 단장하려고 물어 보니 이것은 수입 잔디로 국산보다 6 배나 비싸다고 하던데“ 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여기서 일념비(一念碑) 소개를 좀 해야겠습니다. 소극장 등 문화공간과 음식점 커피숍이 즐비한 대학로를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혜화동 로터리에 접어들면 바로 오른쪽에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 정문 가까운 언덕받이에 낯선 비가 하나 서 있습니다.

학교 관계자나 관심이 있는 동네 사람들이 가끔 눈 여겨 보겠지만 일반인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 3m 높이의 까만 대리석 비는 1945년 조국 광복 직전에 일제(日帝)가 우리 겨레를 치욕적으로 괴롭힌 역사의 또 하나의 증인입니다.

1943년 1월20일 일제는 4,300 여 명의 조선 학생을 ‘학도지원병’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군대에 강제 입대시켰습니다. 그보다 3 개월 전에 공포된 ‘조선학생 지원병에 관한 특별법’에 의한 것으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전국에 산재한 모든 전문학교 및 대학교의 문과 계열 학과에서 공부하는 조선인 학생을 강제 동원한 것입니다.

나는 이보다 앞서 공포된 조선인 징병법에 따른 제1기생에 해당되어 이 법과는 무관했지만 실적을 올리려는 고향 일본인 경찰서장의 집요한 설득을 끝내 거절하고, 따로 1945년 3월10일 용산부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러니 이 학병 선배들보다는 약 14 개월 복무기간이 짧았던 셈이지요.

이 4,300여 명의 조선 지원병 중 30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밖에 이북으로 귀향한 자, 도망 등으로 행방불명된 자 등을 제외한 2,700명의 명단이 1998년 현재 확인돼 이 일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1ㆍ20 동지회는 1963년 당시 생존 확인된 학병 출신자 1,300여 명이 후세에 역사적 교훈을 남길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입니다. 초대 회장은 전 국회부의장 張坰淳(장경순)씨였습니다. 그러나 고령 회원의 사망으로 급속히 수가 줄어 지금은 247 명만 연락이 된다고 합니다. 이 생존 유지들이 <1ㆍ20학병사기(學兵史記)>라는 방대한 비매품 수기를 1984~1998년 네 차례에 걸쳐 발간하고 1998년 8월21일 “민족의 주권과 국토의 통일과 독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직접 호소하는 일념으로 높이 3m 폭 1m의 ‘일념비(一念碑)’를 이곳에 세운 것입니다.

학도병들이 1944년 입대하기 직전에 일주일 동안 예비훈련을 받은 곳이 바로 이 동성고등학교입니다. 학교에서는 건립취지를 듣고 부지를 희사하였으며 건립비용은 회원들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충당되었고, 성금 중 일부는 장학금으로 이 학교에 희사했다고 합니다.

수기의 발간과 비 건립사업은 세 차례에 걸쳐 회장직을 맡은 安東濬(안동준ㆍ90) 전 국회의원의 노력과 郭秉乙(곽병을)씨를 위시한 여러 간사 및 편집위원이 수고하여 완결했다고 합니다. 집이 가까워 수시로 일념비를 찾으며 관리인을 자처하고 있는 곽 선배는 금년 8월 건립 10주년에는 조촐한 기념식을 준비해야 하겠다고 지금부터 걱정이 대단하십니다.

당시 일본군대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 학생이 우리 민족의 귀중한 인재 보고였다는 것은 대한민국 수립 후 이들 중에서 2명의 국무총리를 포함해 10여명의 행정부 장관, 3명의 부의장을 포함한 총 13명의 국회의원, 한 분의 대법원장을 포함한 다수의 법조인사,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군 간부를 배출한 사실이 증명합니다.

국방군의 창설에 있어 이들의 역할은 지대했으며, 최고급인 4성장군 6명을 포함해 60명이 별을 달았고, 그 중 5명이 국방장관, 다른 5명은 총참모장의 직을 맡아 광복된 조국에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일반 사회생활에서의 활약도 괄목할 만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이 4,300여 명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우리 문단에서 크게 활약한 이병주 한운사 장용학씨 등 문학과 일반 예술계에서 대성한 인물도 많고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처럼 재계의 거목으로 국가 재건에 이바지한 인물도 있습니다.

일제가 물러간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이들 조선인 학도지원병이 겪은 단장(斷腸)의 역사는 점점 우리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있지만 조국의 영광을 기원한 그들의 뜨거운 열정은 이 일념비를 통해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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