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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신 다음날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김이경 2008년 04월 26일 (토) 00:23:47
눈꺼풀이 따가워 하는 수 없이 눈을 뜹니다. 입은 마르고 골은 쑤시고 몸을 일으키자 속이 쿨렁댑니다. 술 마신 다음날, 하릴없이 쓸쓸한 날입니다. 간밤의 의기투합은 온데간데없고, 남은 건 홀로 견뎌야 할 숙취와 수치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해마가 술자리의 실수들을 하나하나 불러냅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오, 지구야, 이대로 멈추어다오! 그러나 지구는 핑글핑글 잘도 돌고, 따가운 햇살은 부끄러운 낯을 벌겋게 달굽니다.

삶은 계속됩니다. 더불어, 자학을 포함한 이 모든 게 새삼스런 일도 아니지요. 해장국 끓여줄 사람 하나 없다고 한탄해봐야 점입가경의 신세가 될 뿐이니 스스로 몸을 추슬러 해장에 나섭니다. 몸에 남은 전날의 기억을 흐르는 물에 말끔히 씻어내고 주전자에 찻물을 올립니다. 몸과 마음에 찌든 숙취를 털어내는 데는 쌉쌀한 녹차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새로운 정보를 뇌에 공급하면 괴로운 기억도 잊혀지고 조금은 생산적인 일을 한 것 같아 기분도 나아지니까요.

다만 책을 고를 때는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비극성을 일깨우는 다자이 오사무나 프란츠 카프카는 기피대상 1호입니다. 반 고흐나 체 게바라의 생애를 담은 책도 자기 환멸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금서목록에 들어가지요. 그렇다고 읽으면 바로 잊혀지는 어설픈 책을 집어 들어서도 안 됩니다. 보람찬 시간을 보냈다는 뿌듯함을 주면서도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는, 너무 두껍지도 너무 얇지도 않은 책을 골라야 하지요. 일테면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같은 책 말입니다.

1919년 처음 출간되었으니 꽤 오래된 책인데, 우리나라에선 2004년 갑자기 두 개의 번역본이 거의 동시에 출판되었습니다. 근 백년간 격조했던 작가가 느닷없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셈이지만 많은 독자를 얻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되기엔 앤더슨의 문체가 좀 까칠한 탓일 겁니다. 하지만 이 까칠한 문체가 주는 재미가 만만치 않습니다. 시치미 뚝 떼고 삶의 속곳을 들추고 비아냥까지 섞어가며 사람을 조롱합니다. 그런데도 책장을 덮기가 싫습니다. 모자란 듯 넘치고 넘치는 듯 부족한 와인즈버그 사람들을 보며 킬킬대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셔우드 앤더슨의 이 단편집에는 평범한 듯 그로테스크한 시골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늙은 작가는 “괴상한 사람들에 관한 책”을 쓰고, 떠난 애인에 매달려 청춘을 보낸 노처녀는 어느 날 문득 발견한 제 속의 욕망에 소스라치고, 경건한 목사는 이웃집 여교사의 방을 엿보는 바람에 폭풍 같은 격동에 휩싸입니다. 남들이 보면 별것 아닌 사소한 일에 삶이 온통 흔들리면서도 꿈은 여전히 드높은 사람들을 보니 그래도 내 삶은 꽤 균형감각이 있구나, 자부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좀 걱정스럽기도 하고요. 그런데 와인즈버그라는 마을은 지도에는 없는 상상의 공간이랍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좀 실망스럽습니다. 진짜 그런 마을이 있으면 숨통이 트일 것도 같았는데 말이지요.

사실, 저마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혼잣말을 해대는 이 이상한 시골사람들의 일상은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길에서 혼자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 여자를 보고 기겁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저 또한 부쩍 혼잣말이 늘었으니… 혼잣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게 인생인가 싶고, 그 시골사람들의 지리멸렬한 생에 코끝이 찡해집니다. 그리고 나의 비루함이 나만의 것은 아니며, 비루함만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에 비로소 안심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 속에 타오르는 용광로 같은 열망, 그 열망을 속절없이 미망으로 바꿔버리는 운명의 가혹함. 셔우드 앤더슨은 누구나 그런 가혹함을 견디며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홀로 살아가야 하고 홀로 외롭게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용감하게 맞이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는 구절에 눈이 머뭅니다. 가득 찼던 주전자의 녹차가 바닥을 보입니다. 종일 저를 괴롭혔던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을 숙취와 함께 내려놓고 성실한 생활인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세상에 없는 마을에서조차 사람들은 인생을 완성하고 있으니 술병을 앓기엔 아직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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