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 재미_(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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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 재미

방석순

2008년 05월 05일 (월) 00:33:51

#1
“아버님에겐 얘가 더 어울립니다.”
“아니, 내가 아니고 …”
“아- 네 어르신, 선물하시게요?”
어쩌다 들른 백화점에서 남녀 점원들의 호들갑에 기겁을 하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하긴 이른 아침 선잠 깨어 거울 속에서 서리 맞은 노인네 얼굴을 마주칠 때면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니 백화점 점원들의 알랑방귀조차 듣기 좋을 리 없습니다.

#2
“야, 오늘 나 쫑코 먹었다!”
주말마다 산에서 재담으로 모두를 즐겁게 하던 친구가 그날따라 볼멘 표정입니다. 직선적인 성격이라 감추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왜, 어쩌다가?”
“아까 너희들 기다리다 ‘얘들 뭐하느라 여태 안 와?’ 한마디 했지. 그랬더니 곁에 있던 홍이가 ‘환갑 넘긴 친구들에게 얘들이 뭐냐?’고 핀잔주더라.”

그는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럼 내가 ‘영감들’이라 그래? ‘노인네들’이라 그래?”
따져 봐도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난감한 일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대부분 직장생활을 끝낸 나이. 혈기만은 왕성해서 이것저것 관심이 많습니다. 못마땅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회사 돌아가는 일도, 사회 돌아가는 꼴도.

그러나 아직도 남은 허장성세는 세월의 강물 따라 흘러간 옛 영화의 껍데기일 뿐. 어쩌면 못다 이룬 꿈과 회한의 탓일 겁니다. 아니면 진작 털어 버렸어야 할 집착의 망령일 겁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의 ‘낙화’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정작 싯귀와 같은 위로 속에 떠난 이들의 가슴앓이는 오랫동안 가시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론 아직도 절정에 있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여름 풍성한 그늘을 만들어 주던 가로수도 겨울을 앞두고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맙니다. 가을철 노랑빨강으로 물들어 가던 잎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청소원들은 성가신 일거리를 줄이기 위해 가로수 옆구리를 발로 찹니다. 그래도 모질게 가지 끝에 매달린 잎은 보기에도 딱합니다. 누구에게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3
지하철 풍경도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빈자리를 찾아가는 젊은이들의 잽싼 동작은 경탄할 만합니다. 시력이나 다리의 민첩성에서 한참 뒤진 노인네들에겐 별로 찬스가 없습니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예전엔 그래도 젊은이들이 앉은 좌석 앞에 붙어 서서 눈을 부라리며 무언의 압력을 가하던 노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요즘엔 대부분 그래봐야 별무소용임을 알아챈 것 같습니다. 아예 부딪치고 싶지도 않아 출입구 근처에 버티고 선 노인들이 더 많습니다.

#4
“나 얼마 전 너의 후배 만났다.”
‘얘들’ 설화(舌禍)로 쫑코 먹었다던 친구의 말이라 조마조마해집니다.
“근데 말이야. 널 아냐니까 나보고 되레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묻더라. 그래 동창이라고 했지.”
‘녀석, 사람 많은 데서 무슨 소리하려는 거야?’
“아주 엄격하고 깐깐하지만 장난 안 치는 좋은 선배였다고 칭찬하더라. 그 바람에 나도 기분 좋았어.”
‘후유, 오늘 운 좋았다.’ 성미로 봐서 사탕발림은 아닐 거고, 만나도 운 좋게 날 곱게 본 후배를 만났던가 봅니다. 살다보면 어디 좋게만 지내게 됩니까?

#5
늦은 저녁 메일을 열었습니다. 지난해 길지 않은 기간 독서 교양강좌에서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이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인사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무고하셨지요? <자유칼럼>에 올라오는 교수님들 글을 매번 읽으면서
수료식 이후에도 여전히 교육받고 있습니다. ^^ 동기생들과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좋은 시간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

그들에게도 말했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걸 배웠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잊지 않고 감사의 인사를 보내오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이런 게 늙어가는 재미인가 봅니다.

임철순 (211.XXX.XXX.129)

몇 살부터 노인이냐? 알려 드리지요.
나같은 사람은 젉은이이고
방 대표같은 분은 늚은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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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7 09: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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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24.XXX.XXX.49)

저도 가로수 꼭대기에 매달린 가로수 잎일까요?
한잎 두잎 서서히 떨어지는 낙엽도 아름답습니다.
청소부의 발길질이 썰썰합니다. 떨어지는 것도 서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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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5 21:3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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