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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석에 맞은 8·15의 감격
황경춘 2022년 08월 16일 (화) 00:01:21

100년 만에 장대 같은 장맛비가 서울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든 이틀 뒤 거짓말같이 파란 하늘을 잠깐 보여준 8월의 어느 날, 77년 전 8·15 해방의 놀라움과 감격을 되살려 보았습니다.

8·15라고 줄여 말하는 8월 15일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오래 이름을 남길 여러 사건의 기념일이 겹쳐 있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날입니다. 어떤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대한민국 독립이 전 세계에 공표되어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취임한 1948년 8월 15일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의 기념일로 남을 것입니다. 또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26년 뒤 8·15 경축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재일교포 공산주의자의 총탄에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비명의 죽음을 당한 1974년 8월 15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또 다른 그룹의 시민들은 그날 있었던 서울의 첫 지하철 1호선 개통식을 참관한 감격을 오래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이가 든, 8·15 해방세대라 불리기도 하는 나에겐 1945년 8월 15일이 가져다 준 감격과 흥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고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이날 우리 삼천리강산은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하는 시민들로 흥분과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전쟁 말기 인적자원 고갈에 허덕이던 일본은 국방에 동등한 의무를 갖게 한다는 미명 아래 조선인에게도 징병령을 시행했습니다. 1923년 12월 1일 이후 출생한 남자를 대상으로 한 이 법으로 100명 가까운 중학 동기생의 태반이 징병령을 적용받게 되었습니다.

징병 신체검사에서 갑(甲)종에 합격한 친구 일부에게는 아카가미(赤紙, 붉은 딱지)라 불리는 공포의 징집영장이 이미 도착했고, 을(乙)에 선별된 저는 죽음의 초대장이라고도 불리는 붉은색 징집영장을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드디어 저에게도 징집영장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는 제 생일이었습니다. 부모 형제와 친지들과의 슬픈 이별 뒤에 1945년 3월 10일 용산에 있는 포병부대에 입대하였습니다.

일본 오키나와에 대한 미군의 집중공격이 심해져 태평양전쟁의 전세는 전반적으로 일본에 불리하게 기울어지고 있을 때입니다. 일본은 주도권을 잃고 수도 도쿄가 미 공군 대공습으로 큰 타격을 받는 한편 일본 본토 상륙에 맞서는 오키나와 수비대의 일본 공군과 해군은 전력상 연합군에 크게 뒤져 대등하게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조선인 신병 등은 4주 동안의 기초훈련을 마치고 4월 말에 부대에 나뉘어 배치되었습니다. 중국이나 남양 쪽으로 배치되는가 걱정했는데 부산과 일본 본토 서쪽 끝인 시모노세키를 거쳐 기차로 30시간 만에 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우리 신병을 감독 통솔하는 일본 군인은 나이 많은 소위를 우두머리로 행정 주방 감독 등 10여 명의 하사관과 만년 상등병 등 15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즉 조선인 신병 30여 명과 함께 이들이 새로운 농경부대를 창설한 것입니다. 우리를 수용하는 병사(兵舍)는 무기고가 따로 없고 대신 괭이, 삽 등 농기구를 수용하는 창고와 식당, 세면실, 주방, 식량창고 등 극히 필수적인 생활시설만 있는 미완성 건물이었습니다. 병사를 중심으로 민간 거주지와 논, 밭, 나무가 약간 있는 야산 등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풍경이었습니다.

이 야산이 우리 신병들의 일터였습니다. 이곳에 무수한 전투용 참호를 파는 것이 우리 군인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신병들은 주로 농촌 출신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이 노동은 별 큰 노동이 아니었지만 저를 비롯한 학생 출신 신병에게는 중노동이었습니다. 다행히 제 짝꿍은 제 고향과 가까운 경남 하동(河東) 출신의 노동자로,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지칠 줄 모르는 천생 일꾼이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저는 무상으로 나오는 담배를 모두 그에게 주고 고향에 보내는 엽서도 전부 대필해주며 그의 희생적인 도움에 보답했고, 우리는 서로 가까운 전우가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제국주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 국민에게 통보했습니다. 아무런 소식도 모르고 있었던 우리는 8월 15일 저녁 마을 주최 일본의 추석 축제인 봉오도리(盆踊り) 행사에 초청되어 성찬을 즐겼습니다.

16일에도 작업이 없어 쉬었고, 17일 아침 일찍 영내 화장실에 갔다가 마을 민가에서 들려오는 라디오에서 종전뉴스를 들었습니다. 부대장은 혹시 있을지 모를 조선인 신병들의 소란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일본의 항복 소식을 감추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결국 사태는 수습되고 우리 조선인 신병들은 8월 말에 전원 일등병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제대 명령을 받아 귀향길에 올랐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야말로 잊지 못할 추석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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