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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상화는 또 다른 ‘왕조 실록’
이성낙 2022년 08월 24일 (수) 00:14:51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그의 저서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생각의 나무, 2008)에서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고, 500년 동안 예술성 높은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의학도로서 피부과학을 전공한 필자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백반증(白斑症), 비류(鼻瘤, ‘코주부’), 실명(失明), 국소경피증(局所硬皮症), 다모증(多毛症), 흑달(黑疸), 두창(痘瘡, 마마), 그리고 사시(斜視) 등등의 여러 피부 병변 및 안면 증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초상화가 다양한 임상 진단을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후대 유족들이 남한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험악한’ 초상화도 더러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를 수치로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필자가 조선시대 초상화를 면밀히 연구 검토한 결과, 519점 중 90점(17.34%)만이 정상 피부를 보였습니다. 즉, 초상화 429점(83.66%)에서 다양한 피부 병변 및 안면의 이상한 점을 밝힐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참고: 이성낙, 박사 학위 논문 <朝鮮時代 肖像畵에 나타난 皮膚 病變 연구>(명지대학교 대학원, 2014)

이와 관련해 필자는 일본, 미국, 독일의 피부과학회에서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이라는 내용으로 강의할 기회가 잦았습니다. 특히 2011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세계피부과학회 학술대회(World Congress Dermatology)에서 ‘미술을 사랑하는 피부과학 교수 모임(Chair, Lawrence Parish, MD)’으로부터 한국 미술에 관한 강의를 요청받았습니다.
당시 필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 어진(御眞)의 오른쪽 눈썹 위에 있는 작은 ‘혹(Mole)’을 청중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사람들은 기립박수로 경이로움을 표하면서 “그렇게 가식 없이 그렸다는 것과 그것을 용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태조의 어진 제작 과정을 한번 유추해보겠습니다.
어진을 조성하는 것은 그해의 가장 중대한 국사였습니다. 어진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영의정급 고위 인사가 준비위원장이 되어 당대 최고의 화가를 선정했을 것입니다. 선정된 화가는 어진의 핵심 부분인 용안(容顔)을 화폭에 옮기기 위해 아마도 임금과 약 3미터 거리를 두고 ‘왔다 갔다’ 하며 작업했겠지요. 감독관은 분명 화가가 화폭에 옮긴 용안의 작은 ‘혹’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있는 것을 보이는 대로 그렸군’ 하며 넘겼을 테고, 피사인(被寫人)인 태조 역시 그 ‘흠집’을 묵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태조 어진을 공개했을 때도 주변에서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어진이 오늘날에까지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초상화의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라는 아름다운 화풍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정신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15~16세기면 유럽이나 조선이나 ‘암흑시대’였고, 그런 사회 풍토에서 군주의 초상화 안면에 ‘흠집’을 남겼다는 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초상화 가운데 군주의 얼굴에 흠집을 남겼다는 사실은 미술사에서 그만큼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일입니다. 태조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이 놀라움과 함께 깊은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유입니다.

초상화라는 예술 장르 역시 ‘시대의 바람’, 이름하여 ‘화풍(畫風)’을 타기 마련입니다. 중국은 명(明)나라에서 청(淸)나라를 거치며 초상화에서도 ‘시대의 바람’을 피할 수 없었고, 이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명나라 후기에는 “화가가 너무 작고 사소한 것에 급급하면 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畵者謹毛而失貌)”라고 했는가 하면, 일본에서는 “인목구비(引目鉤鼻) 기법, 즉 아랫볼이 불룩한 둥근 얼굴에 두꺼운 눈썹, 가늘게 일선으로 그린 〱자 형의 코, 그리고 조그마한 주점(朱點)을 찍은 입으로 이루어진 안모 묘사법이 구사되어 있다.” (조선미 교수)고 지적됩니다. 만 명이면 만 명 모두 각기 다른 얼굴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말입니다.

반면 조선 시대 초상화의 지침은 사뭇 다릅니다. 조선 왕실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숙종(肅宗) 14년(1688) 3월 7일 기사는 “한 가닥의 털(一毛) 한 올의 머리카락(一髮)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된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一毛一髮小或差殊 卽便是別人者 誠是不易之論).
동양 3국의 초상화 제작 기법이 이처럼 다르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조선은 518년이란 절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이런 고유의 화풍을 견지해왔습니다. 또한 조선 시대 초상화는 당대의 뛰어난 도화서(圖畫署) 화가들이 남긴 작품인지라 그 수준에도 편차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미술사적으로 더욱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얼마 전 필자의 저서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눌와, 2018)을 살펴본 독일의 한 지인이 책 제목을 ‘흠집의 그 아름다움(Die Schönheit des Makels)’이라고 붙였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는 혜안(慧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 시대 초상화는 꾸밈이 없어 ‘흠집’도 아름답게 다가온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흠집의 그 아름다움’에 담긴 ‘올곧은 정신’은 바로 조선 시대 ‘선비정신’과 맥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조선 시대 ‘초상화’는 조선 시대의 또 다른 ‘실록’이라고 주장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할 만큼 높은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검토할 만한 충분한 근거와 내용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해: 1954년 부산 피란 시절, 왕들의 어진을 포함해 국보급 문화재 3500여 점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고종의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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