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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정에도 가슴은 훈훈하고
최창신 2008년 05월 08일 (목) 02:05:13
-걸어서 탐라(耽羅) 일주(8)-

어처구니없는 수돗물의 단수(斷水)와 씻지도, 소독도 못하고 짜낸 발의 물집들. 어쩔 수 없이 악몽 같았던, 알량한 관광지 중문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8시30분 또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서귀포를 거쳐 남원까지는 갈 요량(料量)이었습니다.

중문-서귀포 사이의 일주도로 좌우에는 유난히 귤 농장이 많았습니다. 걸으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이제까지 보았던 귤 농장들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종전의 귤이 어린아이들 주먹만 하다면 서귀포 길의 귤은 어른의 주먹보다 더 커보였습니다. ‘한라봉’이라고 합니다. 아울러 종전의 양상과는 달리 수확도 깨끗이 되어 있었고 다만 길에서 잘 보이는 울타리 근처에만 탐스런 귤이 열병식(閱兵式)을 하듯 줄지어 있었습니다.

   
  ▲ 제주 귤 농장과 가게는 육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의 체험농장이 되기도 하고 기념품 가게가 되기도 합니다.  
농장에 딸린 어느 가게의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건 언제 수확하나요?”
“신혼여행 온 젊은 부부들과 어린 아이들이 직접 따면서 수확의 체험을 하도록 놓아 둔 것입니다.”
장사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간판마다 무슨 ‘체험농장’이라 쓰여 있길래 뭔가 했더니 이런 것이었군!

그렇게 이른 새벽도 아닌데 길가 그늘진 곳에는 새롭게 얼음이 얼어 있었습니다. 이미 3월이고 여기는 제주도의 남쪽 지방인데 이럴 수가…

왼쪽으로 보이는 한라산 윗부분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푸른색이 감도는 찬 기운을 치맛자락으로 감싸며 아침 햇살을 받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소복(素服)한 여인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용흥동(龍興洞)이라는 마을을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과일가게에서 주인인 듯한 50세가량의 남자가 양손에 귤 두 개씩을 들고 불쑥 튀어나오며 “가시다가 드세요” 합니다. 영문을 몰라 당황했으나 배낭을 메고 터덜거리며 걷는 모습이 안쓰러워 인정을 베푸는 것이려니 싶어 고맙게 받았습니다.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내가 왜 그 길을 가고 있는지 알게 된 그는 감탄과 연민(憐憫)이 뒤섞인 표정으로 커피대접을 하겠답니다. 너무 미안하여 서둘러 사양하고 길을 재촉했습니다. 발은 아팠지만 티 없는 인정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피어오르는 봄기운에 흥이 넘쳤습니다.

‘그럴싸 그러한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볕발 아래 들려라.’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 손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비야 하마 알련만 날기 어이 더딘고.’

위당 정인보(鄭寅普) 선생의 시 ‘조춘(早春)’이 오랫동안 입가를 맴돌았습니다.

   
  ▲ 서귀포 해안을 내려다보는 제주월드컵경기장은 남해 짙푸른 바다를 가르는 돛배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조형물입니다.  
서귀포 가는 길 옆에 위치한 월드컵경기장. 잠시 들렀습니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가? 역시 아름답습니다. 당초 월드컵대회가 끝나면 본부석 건너편 좌석은 절반을 떼어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었기에 정리를 잘 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깔끔하게 되었습니다.

텅빈 운동장. 세계적인 스타들의 현란한 기술도 관중들의 함성도 사라지고 적막감만 흐릅니다. 대형 전광판이 추억의 스크린이 되어 대회 준비할 때의 일들이 뮤직 비디오처럼 되살아납니다.

세월의 흐름이 쓸쓸하게 다가옵니다. 발길을 돌렸습니다. 평생 모르고 살던 외로움이 말라버린 엉겅퀴처럼 온몸에 달라붙습니다. 운동장 주변에 쏟아지는 봄볕이 애잔합니다.

서귀포 근처. 가파르지 않은데도 오르막길이 힘겹습니다. 발 때문입니다. 중문을 떠날 때 물집들을 미리 짜고 압박붕대로 싸맨 다음 반창고를 단단히 붙여 두었습니다. 오래 걷다보니 물집 자리의 통증도 커지고 동여맨 자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괴로웠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단치 않은 배낭도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언덕에서 잠시 쉴 때 배낭을 내려놓고 걸어 보았습니다. 이럴 수가!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웠습니다.

과연 그렇구나! 여성 도보여행가 김남희씨의 강력한 충고가 하나도 과장이 아니었음을 절감했습니다. 삶의 길은 곧 배움의 장(場)입니다.

그녀는 ‘깃털처럼 가벼운 배낭’이 되도록 하라고 강조합니다. 자신은 한 달 동안 국토를 종단하면서도 2박3일 여행자처럼 배낭을 가볍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오래 걷다 보면 어깨가 빠질 것처럼 배낭이 무겁게 느껴진다 했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입니다.

최창신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다.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태권도신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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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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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춘 (61.XXX.XXX.115)
매번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다시 읽은 일본 작가 시바 씨의 "탐라기행"과
대조하며 새로운 제주 이야기 수고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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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9 11: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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