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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노인과 찰스 3세
박상도 2022년 09월 19일 (월) 00:01:15

학창시절 세계사를 배울 때, 입헌군주제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Kings reign but do not govern)"는 말은 시험을 위해 외우기는 했으나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당시 혈기 왕성한 청년인 필자로서는 전제군주제하에서 그렇게 많은 억압과 핍박을 받으며 어렵게 혁명에 성공했음에도 군주제를 유지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군주제를 받들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답답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할 거면 프랑스 혁명처럼 제대로 엎어버려서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이 전 세계에 퍼지게 하는 것이 더 나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린 학생이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경우, 정치인의 후손이 대를 물려 정치를 하는 경우가 매우 흔합니다. 2021년 총선에서 자민당의 당선자 261명 중에 87명이 세습 정치인이었습니다. 무려 3분의 1이 대를 이어 국회의원이 된 겁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위로부터의 개혁, 즉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든 경험이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왕과 유력 정치인에 대한 존경과 신뢰의 유산을 심어 줬을 거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일본이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영국 역시 빅토리아 시대에 해가 지지 않는 찬란한 영광을 누린 시기가 있었고 그러한 역사적 유산이 후대 국왕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70년을 재위했던 엘리자베스 2세 개인에 대한 영국 국민의 존경과 지지 역시 군주제가 유지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는 분석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찰스 3세가 즉위하면서 더 이상 군주제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들려 옵니다. 다이애나비와의 이혼과 커밀라 파커볼스와의 불륜으로 인기가 떨어진 찰스 3세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그다지 크지 않은 데다, 즉위식에서 서명을 하며 탁자 앞에 놓인 펜 받침대를 치우라며 짜증을 내는 모습이 생중계되며 자질 논란까지 불거졌습니다. 일부에서는 펜 받침대에 놓인 펜들이 일본 Pilot(파일롯)사의 V-pen이어서 역사적인 순간에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제품이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의견은 있으나, 내막이야 어찌됐든 대중은 그런 중요한 순간에 의전 담당 직원에게 짜증을 내는 찰스 3세의 못된 표정을 더 오래 기억할 겁니다.

“뭐 한 게 있다고 세습 지위를 누리느냐?”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물론 세상사가 이성과 논리로만 작동하지는 않아서 군주제가 더 지속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선대 왕의 시대에는 나오지 않던 주장들이 찰스 3세 시대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찰스 3세를 보며,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며 반말을 했던 노인이 겪은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간략하게 내용을 정리하면 편의점에 들어온 70대 노인이 아르바이트생에게 “OO담배”라고 담배 브랜드 이름만 짧게 말했답니다.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이 “2만 원” 이라고 짧게 답하면서 시비가 시작됐습니다. 화가 난 노인이 “어디다 대고 반말이냐, 내가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다.”고 따지자, “네가 먼저 반말 했잖아”라고 받아쳤고, 격분한 노인이 욕설을 퍼붓자 아르바이트생이 경찰을 불렀고, 이후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어 1심과 2심 재판을 거치면서 노인에게 벌금 50만 원이 선고된 사건입니다.

반발에 반말로 응대한 아르바트생이 주는 충격이 크긴 하지만, 이 뉴스의 본질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한 노인이 아르바이트생에게 욕설을 한 잘못 때문에 처벌을 받은 판결에 있습니다. 나이를 떠나서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면 넘지 않았어야 하는 선을 넘은 겁니다. 욕설과 고성이 없이 ‘반말을 했네, 네가 먼저 반말을 했네’ 정도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아르바이트생의 태도가 부적절했다고 지적 받을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랬다면 기사화되지도 않았겠지요.

시대가 변해서 나이 많은 것이 벼슬인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간 느낌입니다. 마찬가지로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왕이 되는 시대 역시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대접을 받을 만한 소양을 갖춰야 하고 그 소양 중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에 대한 존중입니다. 찰스 3세가 서명을 하면서 수행원에게 보인 짜증난 표정과 제스처에서 사람에 대한 존중을 느낄 수 없었듯이 아르바이트 생에게 반말을 하다가 욕설까진 한 노인 역시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없어 보입니다.

찰스 3세와 영국 정부는 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할 겁니다. 새로운 국왕이 알고 보니 인간적인 매력이 있고 유머러스하다는 식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할 겁니다. 최근에 길을 걸어가는 찰스 3세에게 군중 중 한 사람이 “찰스, 맥주 한잔 하러 갈래요?”라고 외치자 “뭐라고요?”라고 되묻고 다시 그 사람이 “맥주 한잔 할래요?”라고 묻자, “어디로 갈 건데요?”라고 익살스럽게 웃으며 답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는데, 이 뉴스가 앞의 부정적인 뉴스로 인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희석하고 있습니다. 이 보도에는 국왕이 대중과 접촉을 하고 대중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유머러스한 대응까지 다 등장합니다. 이 장면이 의도된 연출일 수도 있고 영상 편집으로 장점만 부각시킨 것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아마 찰스 3세를 미화하는 이러한 기사는 앞으로도 종종 생산될 듯합니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도 이를 유지하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지키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교육이 계속 이어졌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지요. 시험에 나오지 않는 한자와 예의범절 따위는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 겁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외우고 이것이 무엇을 실현하는 방법인가? 라는 문제에 인(仁)이라고 정답을 맞힌 어른들 세대 역시 배운 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도덕과 예의? 그 따위 것 지켜봐야 항상 손해만 보더라’라는 생각이 만연해서 스스로 헌신짝 버리듯 예의를 잊고 산 결과가 어른의 반말에 반말로 대응하는 젊은이를 생산해낸 겁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면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올바른 전통을 세우고 그 전통을 지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기성세대가 이미 내다버린 예의범절을 후대에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가슴이 더욱 아픈 건 KBS가 인터넷에 올린 위 사건의 기사 제목이 <“반말에는 반말로”.. MZ 알바의 ‘진상 손님’ 대처법> 이라는 겁니다. 아마도 젊은 기자 또는 인턴 기자가 제목을 뽑았을 겁니다. 제목에서 알바생이 반말하는 노인에게 같이 반말로 맞받아쳐서 참교육을 시전했다는 뉘앙스가 풍깁니다. 기사의 댓글은 마치 여당 지지자와 야당 지지자들의 대립처럼 극명하게 둘로 나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집단 별로 양분되어 싸우는 것이 일상이 됐는데 여기서도 여지없이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왜 이렇게 됐는지 고민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른이 너무 편하게 아무 데서나 반말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젊은 친구가 일흔 살이 넘은 노인에게 “네가 반말하니까 나도 반말한다.”고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궁금합니다. 이 문제도 담배 피우는 중학생들 못 본 척 지나가듯이 어찌됐든 내 일이 아니니까 알 바 아닌 건가요?

논어 자한편에, "삼베 관을 쓰는 것이 예(禮)이지만, 요즘은 명주 관을 쓰는데, 이는 검소한 일이다. 그래서 나도 대중의 관습에 따르겠다. 그런데 임금을 뵐 때, 당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인데 요즘은 당 위에서 절을 하니 이는 교만한 일이다. 그래서 비록 대중의 관습과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 아래에서 절을 하겠다."고 공자가 얘기한 구절이 나옵니다. 관습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 역시 관습이 변하면서 새롭게 변하기도 합니다만, 공자는 그 변하는 방향이 올바르면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전의 것을 지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해 나이 먹는 것 만으로 대접을 받는 시대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무시당하고 조롱을 당해도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필자는 나이를 떠나 반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어린 사람에게 반말하는 모습도 보기 싫지만, 손주 뻘의 젊은이가 노인에게 “네가 내게 반말했지? 지금부터 나도 말 놓는다.” 라는 말을 옆에서 들으면 끔찍할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예의를 찾는데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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