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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사회와 신사협정
이성낙 2022년 09월 26일 (월) 00:00:48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은 필자가 오래전 외국 유학길에 오를 때 처음 듣고 가슴에 담은 명구입니다. “푸른 산이 있으면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그런 곳이면 사람이 살기 마련이고, 사람이 살 만한 곳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필자가 구미(歐美) 문화권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되어 살아온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고, 그동안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동양과 서양의 삶이 다른 듯하면서도 큰 틀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럽이라는 생활공간에서 살다 보면, 소소한 차이가 종종 큰 차이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걸 실감할 수 있습니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한겨레출판, 1999)의 홍세화 저자는 파리에서 택시 기사로 생활하며 느끼고 겪었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프랑스 사회의 특징으로 ‘관용 정신(Tolerance)’을 꼽습니다. 한 동료와 비교적 격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다음 날 그 동료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을 대하더라면서 말입니다. 저자는 그 바탕엔 타인의 의견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 해도 그걸 ‘다른 의견'으로서 인정하는 ‘관용 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책을 읽고 필자는 그렇다면 독일 사회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독일은 필자가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낸 곳이고, 여러 면에서 프랑스와 비교되는 나라입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독일은 ‘논리(Logic)가 주도하는 사회’ 아닌가 싶습니다. 의견을 나누다 보면, “내 주장이 논리적으로 틀립니까?” 하면, “당신 주장은 논리적이라 받아들이겠다.”라며 어떤 토도 달지 않고 승복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주해: 어느 국가나 민족성의 특징을 몇 자로 규정하는 것은 자칫 편견을 조장할 수 있기에 극히 조심합니다.]

좀 다른 얘기인 것 같지만, 서구의 생활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고 지금도 끼치고 있는 것이 각종 스포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스포츠의 중심에는 ‘승복 정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골프 규칙’을 한 가지 예로 보면, 서구적 사회 정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멀리 200m 날아간 타구도 1타로 계산하고, 그린 위 5cm 홀 앞에서 마무리한 타구도 1타로 계산합니다. 이는 “200m도 1타, 5cm도 1타로 한다.”라는 ‘합의된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필자가 ‘스포츠 정신’을 새겨야 한다고 배웠던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이와 관련해 작금의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관용 정신도 볼 수 없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하물며 승복 정신조차 온데간데없습니다. 매우 부끄럽고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근래 우리 사회에 팽배한 갈등 국면은 정치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의 소리가 각계에 진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5년 전 정권 교체기에도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명 ‘고위 공직자 알박기 인사’가 대통령 임기 몇 달을 앞두고 이뤄졌는가 하면,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야당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세를 펼쳤습니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각기 다른 현상이지만, 모두 ‘신사 정신’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Gentleman Agreement(신사협정, 紳士協定)’라는 낱말은 서구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권에서도 비교적 폭넓게 토착화한 외래어입니다. 오래전 서구에 회자하던 ‘기사도(騎士道)’와 맥을 같이하며 면면히 이어져 온 사회정신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신사 간에 약속·협정된 사항은 어떤 성문화한 조약보다도 상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리가 법보다 상위 개념인 것과 같습니다.

독일에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기독민주사회당(CDU/CSU)에서 독일사회당(SPD)으로 또는 그 반대로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큰 잡음이나 추태를 드러내는 정치 풍토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무언의 ‘신사협정’이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새 정부가 들어서면, 정치계는 첫 100일간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름하여 ‘밀월 기간’입니다. 언론도 이 적응 및 준비 기간을 존중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근래 국내 정치계의 모습을 보면, 분통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 서글퍼지기까지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반복돼온 이런 추태는 우리 정치계가 반드시 시정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득, 필자는 ‘신사협정 정신’에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국내 정치계 및 언론계가 다음과 같은 내용에 동의하는 협약을 맺는다면 어떠할까 해서입니다.
 가) ‘고위 공직자’의 임기는 임명권자의 임기와 같이한다.
 나) 새 정부가 들어서면, 야당은 100일간 부정적인 비판을 삼가며 묵묵히 지켜본다.
 다) 국내 언론계도 ‘신사협정’에 동참한다.
 라) 어떤 매체도 협정 기간 중 여론조사를 시행하지 아니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분명한 것은 5년 전 야당의 모습도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오늘의 정치 풍토가 다음 세대의 정치 풍토에도 책임이 있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품격 사회로 가는 길목에 우리네 ‘선비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신사협정’을 다시금 반추해봅니다. 아울러 ‘인간도처유청산’의 깊은 뜻을 누리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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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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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청암 (1.XXX.XXX.90)
100% 공감합니다. 한국 정치계에 꼭 필요한 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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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6 12:17:35
0 0
Sungnack1212 (218.XXX.XXX.234)
공감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22-10-28 19:08:3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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