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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링을 바꾸며
권오숙 2022년 09월 27일 (화) 00:02:28

몇 년 전 아들딸에게 전화하면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멋진 팝 음악이 듣기 좋아 아들의 도움으로 처음 컬러링을 설정했습니다. 컬러링은 상대가 전화를 했을 때 내가 응대하기 전까지 흘러나오는 음악입니다. 결국 사용자 자신은 듣지 못하니 오로지 내게 전화를 걸어준 상대를 위한 서비스인 셈입니다. 그 음악은 내가 원하는 곡을 고른 뒤, 그 노래 중 원하는 부분을 잘라 설정합니다. 전화 상대가 나의 응대를 기다리는 동안 그렇게 설정된 짧은 마디들이 반복되어 흘러나옵니다.

나의 첫 컬러링은 들국화의 “걱정 말아요 그대”였습니다. 젊은 시절 힘들 때마다 나 자신을 위로하며 듣고 부르던 노래죠. 나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라는 가사 부분을 끊어 사용했습니다.

이 컬러링을 사용하고 여러 에피소드가 생겼습니다. 유독 친정 오라버니가 내 컬러링을 좋아했습니다. 어떨 때는 그 노래를 듣고 싶어 전화하기도 했습니다. 또 언젠가 오라버니는 내가 전화를 빨리 받았다고 화를 냈습니다. 한창 감상 중인데 너무 빨리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학회의 어느 노교수님은 내 컬러링을 듣고 내가 들국화 마니아라고 생각하여 소장하고 계시던 친필 사인이 담긴 들국화 CD를 선물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름 한국의 록 그룹으로 인정받는 그들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설정한 탓에 다소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혹 컬러링이 너무 소란스러우니 바꾸라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화를 건 상대를 위한 서비스라 할지라도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다 맞출 수는 없고 그냥 소신껏 같은 곡을 꽤 오래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그 노래를 그토록 좋아하던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난 뒤, 전화를 할 때마다 오빠가 생각난다는 언니의 하소연을 듣고 컬러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리운 오라버니와 함께 첫 컬러링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곡을 고르면서 엄청 오래 고민하였습니다. 짧은 컬러링이 내게 처음 전화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에 대한 첫인상을 심어줄 테고, 만약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된다면 나의 한 부분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르고 또 고르던 중 문득 허망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다 톡으로 문자나 보내지 직접 전화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이렇게 컬러링에 신경을 쓰고 있나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하루에도 수십 통의 문자가 날아들지만, 직접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친구나 친지들과도 몇 개월에 겨우 한 번씩 통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언제부터인가는 좀 소원한 관계에서 직접 전화를 하는 것이 오히려 실례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신중히 컬러링을 고르는 수고가 헛헛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새삼 예전과는 달라진 우리의 인간관계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격조했던 지인을 만나 그간의 근황을 듣고, 좋은 일이 있으면 호들갑 떨며 박수를 쳐주고, 위로가 필요하면 따뜻한 포옹을 해주던 것이 대부분 문자로 대체되었습니다. 나 대신 이모티콘이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고, 내가 아닌 이모티콘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상대가 어디에 있든 축하도 위로도 쉽고, 빠르게 해줄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관계에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말하는 소위 ‘꼰대’이기 때문일까요?

꼰대여도 좋습니다. 신세대와는 달리 나만의 촌스런 방식으로 사람들과 더 진하게 소통하기 위해 나는 수요도 없는 새 컬러링을 신중히 골랐습니다. Lasse Lindh의 ‘Run to You’라는 곡입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스웨덴 출신 가수가 부른 달콤한 사랑 노래입니다. 그중에서도 언제라도 너에게 달려가 영원히 지켜주겠다는, 조금은 오글거리는 가사 부분을 땄습니다. 혹시 내 전화번호를 눌러 주는 귀한 손이 있다면 그의 귀에 들려주고 싶은 달콤한 한마디라고 할까요?

난 사람 욕심이 많은데 다행히 인복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한번 맺어진 귀하고 소중한 인연을 지키려고 늘 노력합니다. 그들의 기념일을 행복하게 해 줄 작지만 감동적인 선물을 고르느라 고뇌하고 신경 씁니다. 내 얕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누고자 합니다. 가끔은 그런 노력이 성가시고 버거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연이 내 삶을 한결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어줍니다. 나를 더 지혜롭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인생 선배님들도 계시고, 내가 더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도록 자극이 되어 주는 각 분야의 저명인사들도 있습니다. 하나의 인연이 더 좋은 인연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비교적 유명하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영국 사극 『헨리 6세』에서 한 인물이 “우정은 우리를 신선하게 만든다.”(Friendship makes us fresh. 1부 3막 3장 6행)고 말합니다. 좋은 이들과의 진솔한 인간관계로 늘 나의 삶이 신선하게 느껴지길 바라고, 나도 다른 이의 삶을 신선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컬러링 하나도 온 정성을 다해 고릅니다. 품격 있는 클래식 곡도 좋겠지만 모든 이가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부드럽고 달콤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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