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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과 만년필의 암흑기
박종진 2022년 11월 03일 (목) 01:16:26

펜 끝에 포인트 대신 볼(ball)을 붙여 필기구를 만들 생각을 한 것은 1888년이었습니다. 실용적인 워터맨의 만년필이 등장한 지 몇 년 되지 않았고, 화살 클립으로 유명한 파커가 사업을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볼펜이라고 불리는 이 필기구는 당시에 상용(常用)화 되지 못했습니다. 기술이 공학적으로 완벽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필기구 세계는 뚜껑을 열면 바로 사용할 수 있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쓸 수 있는 실용적인 만년필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만년필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클립이 달렸으며 스포이트 없이 잉크를 넣는 방법이 개발되었고 손잡이에서 잉크가 새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만년필의 발전이 더욱 가속화되어 평생 보증, 컬러, 플라스틱, 유선형 등이 나타났고, 1930년대에는 잉크의 잔량을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잉크 충전 방식과 투톤 펜촉이 등장하였습니다. 1920~1940년까지 약 20년 동안은 그야말로 만년필의 황금시대였습니다.

1940년대 필기구 세계는 격변(激變)기를 맞이합니다. 두 개의 필기구가 운석처럼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세상에 등장한 것은 파커51입니다. 파커51은 마름에 강하도록 끝만 살짝 드러낸 펜촉에 완벽하게 아름다운 유선형 몸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커51은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이 새로운 형태는 삽시간에 유명해져서 쉐퍼를 제외한 거의 모든 회사들이 파커51을 닮은 만년필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워터맨이 만든 전형적인 만년필 모습은 구식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정체기를 극복한 볼펜의 등장이었습니다. 1945년 미국 뉴욕 김블 백화점에서 판매를 시작한 레이놀즈 볼펜은 첫날부터 1만 개가 팔릴 만큼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실용성을 갖추지 못한 이 볼펜의 인기는 그저 거품일 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너도나도 볼펜을 만들기 시작했고 필기구 세계는 쓸모없는 볼펜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1950년대 빅(Bic)과 파커(Parker) 그리고 크로스(CROSS)에서 실용성을 갖춘 볼펜을 선보였습니다. 만년필의 매출은 뚝 떨어졌고 그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벌어졌습니다. 필기구의 중심은 이제 만년필에서 볼펜으로 옮겨갔습니다. 볼펜이 새로운 강자가 된 것입니다.

볼펜이 대세(大勢)가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한 만년필 회사들은 암흑기를 견디지 못해 쓰러지거나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만년필의 종가(宗家)인 워터맨이 쓰러졌고, 파커만큼 큰 회사였던 쉐퍼 역시 크게 흔들렸습니다. 유럽의 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만년필 회사인 죄넥켄이 문을 닫았고, 영국의 데라루 사(社)도 만년필 사업을 접었습니다. 죠터(Jotter)라는 좋은 볼펜을 가지고 있던 파커는 그나마 피해를 덜 입었습니다.

   
  (좌) 파커75 세트 / (우) 파이로트 캡리스 1960년대  

살아남은 회사들은 어떻게든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는데, 한 가지 방법은 볼펜에 주도권을 주고 그에 어울리는 만년필로 세트를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1960년 몽블랑은 대표 모델인 149를 제외한 나머지 144, 146 등 140 라인을 과감히 정리하고 볼펜에 어울리는 새로운 만년필 라인(line)인 2digit 시리즈를 내놓았습니다. 파커 역시 1963년 파커75를 발표하였는데, 파커75의 만년필과 볼펜 세트(set)는 당대 최고라고 할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적극적으로 볼펜을 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3년 파이로트(Pilot)는 볼펜처럼 뚜껑 없이 뒷부분을 돌리면 펜촉이 나오는 캡리스(Capless)를 내놓아 위기를 돌파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기는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나쁜 방법이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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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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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욱 (175.XXX.XXX.32)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물건이 만들어지는 것이 그냥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싸여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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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3 20:23:22
1 0
박종진 (211.XXX.XXX.243)
그럼요 차곡차곡 쌓여 뭔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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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7 09:16:38
0 0
뽀로로가좋아요 (110.XXX.XXX.162)
항상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어서 비처 알아차리지 못하던 사실이었는데 이런 역사가 있었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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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3 12:35:05
1 0
박종진 (211.XXX.XXX.243)
참 신기하죠^^ 깊이 들여다 보면 사연 없는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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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7 09:15:38
0 0
Nerie (211.XXX.XXX.212)
회사의 주력제품과 정반대의 물건이라도 변화의 물결을 거부하기만 하면 결국 사라지는 건 자기 자신인가 봅니다. 제 때 대처할 여력이 있는 회사들이 살아남았나 싶기도 하고요. 만년필 회사들이 힘써준 덕분에 볼펜의 디자인도 이렇듯 아름답게 진화한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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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3 12:31:12
1 0
박종진 (211.XXX.XXX.243)
맞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결국 아름다운 것으로 귀결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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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7 09:14:29
0 0
양양이 (118.XXX.XXX.131)
볼펜의 등장이 다른 필기구-만년필에 큰 영향을 주었군요!
그 다음에는 여러 필기구가 어떠한 시절을 맞이할지 궁금하네요.
오늘도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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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3 11:08:02
1 0
박종진 (211.XXX.XXX.243)
큰 관심은 반드시 어떤 결과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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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7 09:12:10
0 0
단석 (175.XXX.XXX.215)
필기구 이야기가 제국의 흥망사 보는 것 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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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3 10:38:59
1 0
박종진 (211.XXX.XXX.243)
모든 역사엔 드라마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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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7 09:10:09
0 0
김봉현 (106.XXX.XXX.225)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여러가지 노력들이 모여 현재의 우리가 멋진 물건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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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3 08:32:15
1 0
박종진 (211.XXX.XXX.243)
열심히 노력하는 것 언제나 승리합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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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7 09:09:2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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