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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것 이야기
박종진 2023년 01월 02일 (월) 04:46:18

팅. 좀 있다 또 팅. 조용한 5학년 교실에 청량하게 울려 퍼지는 이 소리는 너무 듣기 좋았습니다. 소리 날 때마다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고, 수업은 뒷전, 몸과 마음은 온통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궁금한 물건은 일본에서 온 샤프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저만 신경쓰였던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서너 명이 그 학생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을 때 “이 샤프는 이렇게 심이 짧아도 쓸 수 있어.” 검은색의 몸체와 번쩍이는 은백색으로 유난히 뾰족하고, 기다란 파이프가 달린 앞부분과 날렵한 클립이 달려 있던 이 샤프는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사실 메커니컬 펜슬로 불러야 할 샤프가 필기구 세계에서 인기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양과 서양 통틀어 지금껏 필기구의 역사에서 뾰족한 것은 좋은 필기구의 첫 번째 조건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천 년간 동아시아에서 사용된 붓[筆]은 네 가지를 갖추어야 하는데, 뾰족할 것, 가지런하며, 둥글고, 튼튼해야 하는데 늘 첫 번째 등장하는 것이 뾰족한 것입니다. 필기구가 뾰족해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아름다운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가는 선을 낼 수 있어야 하고 종이로 대표되는 한정된 공간에 많은 글씨를 쓸 수 있게 작은 글씨를 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처럼 뾰족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예뻐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커니컬 펜슬은 언제 등장하였을까요? 앞에 있는 에피소드가 1980년대이니까 1980년대일까요? 아닙니다. 지금부터 무려 200년 전인 1820년대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에서 나왔습니다. 산업혁명 시기에 필기구 세계 역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깃털 펜이 스틸 펜으로 바뀌고 있었고, 종이 역시 사람이 한 장 한 장 뜨지 않고 기계로 대량생산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밀접한 연필의 세계 또한 광산에서 덩어리로 캐내 톱으로 잘라 심을 만들던 방식에서, 흑연을 가루로 만들고 점토를 섞어 불에 구운 점토 흑연이 등장하여 기술적으로 가는 심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좌) 손가락 만한 1800년대 메커니컬 펜슬(금도금 터키석 장식).
(우) 뒤를 잡아 빼 길이가 늘어난 1800년대 메커니컬 펜슬(금도금 매직 펜슬 유형).
 

여기에 귀찮게 깎지 않고 늘 뾰족한 연필을 갖고 싶은 욕구와 솜씨 좋은 기술자의 노력이 더해져 메커니컬 펜슬은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초창기 메커니컬 펜슬은 지금처럼 주로 학생이 쓰는 저렴한 필기구가 아니었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것도 꽤나 많이 있을 만큼 여간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면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급 재질과 아름다운 장식에도 불구하고 가늘게 써질 뿐 완벽한 필기구가 되기엔 여러모로 부족하였습니다. 휴대 때문인지 대부분의 것들이 오래 쥐고 쓸 수 없을 만큼 짧고 무게 중심이 맞지 않아 불편하였습니다. 그리고 글씨를 쓸 때 심은 흔들렸습니다. 필기구 자체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의 비싼 노리개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메커니컬 펜슬.  

그런데 이 메커니컬 펜슬이 전기를 맞이한 것은 90년 정도 지난 1910년대 미국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만년필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것이 나올 만큼 신제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다른 산업보다 서너 배 더 성장하고 만년필 산업은 뛰어난 사람들의 각축장이었고, 이런 열기는 어떤 새로운 필기구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뜨거웠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등장한 이 새로운 메커니컬 펜슬은 필기구로 매우 쓸 만했습니다. 적당한 길이에 오래 잡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고 심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필기구다운 메커니컬 펜슬이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이 펜슬은 엄청나게 크게 성공하였고 메커니컬 펜슬의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급격하게 이동합니다.

역시 본질입니다. 필기구는 필기구다워야 합니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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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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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211.XXX.XXX.212)
초기 개발비를 생각하면 예상 소비자층은 일반인이 될 수 없었을테니 실용성보다는 장식성을 더 중요시했나 봅니다. 그러다보니 포기한 성능도 많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실용적인 20년대의 제품도 아름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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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12: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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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책 또는 그림처럼 단편적으로 말고, 1820년대 당시 사회가 어떠 했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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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3 12: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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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 (39.XXX.XXX.54)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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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11: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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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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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3 12: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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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211.XXX.XXX.78)
화려한 것이 멋지긴 하지만, 역시 진정한 아름다움은 본질에 충실한 것에서 나오는 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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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08: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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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쓸모 있는 삶이 아름다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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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0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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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앗 (118.XXX.XXX.64)
소수만의 점유물일 때에 비해 다양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을 때, 본격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나 보네요.
오늘도 재미난 이야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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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08: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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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맞습니다. ^^ 그래야 보편성도 더 굳건 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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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09: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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