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주변 사람들에게 무심하게 대해온 잘못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쓰고 나니 다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남에게 잘못한 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먼저 고3 시절,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때의 일입니다. 오후 종례 시간이 되니 저마다의 일로 가까이 앉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느라고 꽤나 소란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A의 책상 위로 하얀 봉투를 던지듯 놓아 주었습니다. 아무도 거기에는 관심을 주지 않는 듯했는데, A가 봉투에서 꺼내 든 서류 뭉치를 옆에서 훑어보았습니다. 그건 어느 직종의 임시직 양성 프로그램 안내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A의 성적으로는 대학 입시를 치르기에는 힘겹다고 보고 대안을 권고한 것입니다. A는 조용히 서류를 들여다보기만 했습니다. 나는 다소 흥분한 상태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왜 임시직이야? X 대학에 진학해. 그러면 정규직으로 갈 수 있잖아.” 그의 입장이나 사정은 묻지도 않고 나의 기준으로만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응이 없는 그에게 다음날 내게는 필요 없어졌고 X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려면 소용이 되는 참고서들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책을 받았습니다. 입시 날짜가 촉박한데 새로운 참고서를 볼 수 있을까, 또는 본다 해도 도움이 될까 하는 고려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돋워 준다는 생각만으로 그랬습니다.

시험 철이 끝나고 보니 그는 진학에 성공했습니다. 이후엔 자연스럽게 정규직으로 취직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니 그 직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까지 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조용하기만 하던 그가 언젠가 동기들의 모임에서 주위 친구들과 맛깔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한 가지 더 작은 일이 생각났습니다. K는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후배입니다. 결혼한 이후 미국에서 살던 그와 2000년대가 되어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타국에서 수고하는 한편 자녀들을 잘 키운 이야기를 비롯해서 지나온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대화 중 그가 나에게 감사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학생 시절 교회 수양회에 참가한 일을 말했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기억이 살아났습니다. 1970년대 초반, 삶이 단조롭던 시절에 중〮·고등학생의 여름 수양회는 큰 이벤트였습니다. 야외에 가서 캠핑을 하면서 3, 4일간 지내는 일은 신나고 흥분되는 일이어서, 신앙 훈련조차 재미로 여기던 때였습니다. 모처럼 야외에 가니 본 프로그램 외에 여흥 프로그램까지 곁들여져 있었지요. 그가 되살린 기억은 재미있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핸가 수양회 출발일 아침, 후배들의 출발 모습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에나 항상 일찍 출석하는 K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직감했습니다. 그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참가비를 내지 못한 K는 방 안에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를 일으켜 세워 출발 장소로 끌고 갔습니다. 

막무가내로 출발 버스에 태웠습니다. 참가비 같은 것은 머릿속에서 고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이나 학생 중 아무도 비용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K는 그 오래된 일로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오래전의 일들이지만 주변 사람을 무심히 대하지 않고 배려해준 적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라도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일도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내 반대의 경우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도하거나 않거나에 관계없이 주위 사람에게 선한 영향만을 주며 지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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