線의 여행(2)_(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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線의 여행(2)

김수종

2008년 05월 21일 (수) 08:09:56


	▲ 높이 4백척에 이르는 ‘조슨다리’ 절벽은 제주도에서 가장 자연이 잘 보전된 곳 중 하나다.

사월이 끝날 무렵 ‘제주올레’ 팀을 따라 해변걷기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지난번 코스 종점이었던 서귀포시 난드르(대평리) 박수포구에서 출발하여 절벽을 기어 올라 가는 스릴 넘치는 길이었습니다. 유채꽃 색깔은 퇴색했지만 흐드러지게 핀 오만 가지 들꽃이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와 화순리 사이에 높이 130미터, 길이 약 1천5백 미터의 절벽이 시퍼런 태평양을 가로막고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 절벽을 ‘조슨다리 기정’이라고 부릅니다.


	▲ 쪽빛 바다, 검붉은 절벽, 짙푸른 송림이 트래커를 유혹한다.

200년 전쯤 대평리 사람들은 이웃 화순 마을로 가기 위해서 바로 절벽 밑 바위틈을 통과하는 ‘저승문’과 멀리 산을 돌아가는 ‘몰질’(말길)를 택해야 했습니다. 저승문은 발을 헛디디는 순간 물귀신이 될 위험이 컸고, 돌멩이로 가득 찬 몰질은 20리나 걸어야 할 정도로 고단한 산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호당 보리쌀 반말씩을 공출한 후 석공에게 부탁하여 절벽 돌을 쪼아 길을 내게 됐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암벽 등반로를 개척한 것입니다. ‘조슨다리’는 돌을 쪼아 만든, 절벽 밑과 절벽 위를 연결하는 다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절벽을 의미하는 방언 ‘기정’ 이 붙어서 이 웅장한 절벽이 ‘조슨다리 기정’ 또는 단순히 ‘조슨다리’라고 불리게 된 겁니다.

근대화 이후 마을과 마을을 잇는 포장도로가 뚫리면서 이 ‘조슨다리’ 길은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거의 40년 간 인적이 끊긴 이 길은 숲과 가시덩굴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제주올레가 옛 길을 복원하여 절벽 위를 걸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마 제주도 해변 중에서 가장 험악한 트래킹 코스일 것입니다.

이 절벽은 바다에서 올려보아도 절경이지만, 숨을 헐떡거리며 ‘조슨다리’를 기어 올라 해발 130미터의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평양 바다가 숨을 막히게 합니다.

그 높은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왼쪽 눈으로 태평양을 바라보고 오른쪽 눈으로 아름다운 송림과 오름을 힐끔거리며 걷는 긴장이, 제주 섬의 다른 어떤 해변과는 전혀 다른 걷기여행의 맛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제주도의 다른 바닷가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것은 까만 현무암, 파도, 수평선, 어선 위를 맴도는 갈매기 같은 오밀조밀한 해변 풍경입니다.


	▲ 당케 포구

이 조슨다리 절벽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그 분위기부터가 대양입니다. 마라도 저편에 곡선으로 펼쳐진 수평선을 보며 우리나라와 태평양이 맞닿아 있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해변에 설 때 암암리에 잠재하는 것은 자신의 등뒤에 서 있는 넓은 대륙입니다. 그러나 이 조슨다리 위에서는 대륙보다 더 넓은 원초적인 바다를 느끼게 됩니다.

제주도 해변에서 바닷가의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성산일출봉과 함께 두말 없이 이곳을 들 수 있습니다. 옛날 제주도 사람들은 그래서 이어도를 그릴 수 있었나 봅니다. 파랑도나 이어도의 판타지를 그리고 싶은 화가나 시인에게 이 언덕만큼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슨다리’가 제주의 비경(秘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주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제주도 해변 중에서 지형이 가장 험악하고 주위에 ‘군산’ ‘말오름’ ‘다레오름’ 등 여러 개의 산이 포개져서 불도저가 아직 마음대로 삽질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이 거의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불만이 있다고 합니다. 그 웅장한 절벽 밑에 관광도로를 건설하고 싶어하고, 절벽 위에 중문관광단지보다 더 경치가 좋을 컨트리클럽이나 레조트 타운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절벽 위의 땅은 거의가 주민이 아닌 외지인들이 점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제주올레’가 트는 길을 보면서 땅 소유주들은 즐거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땅이 제 가치를 조명 받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조슨다리’ 절벽 서쪽 끝에서 본 화순항 전경

‘조슨다리’ 일대는 그 아름다움 못지 않게 역사의 한 여울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절벽 밑에 깊숙이 위치한 박수포구는 일명 ‘당케’라고 불립니다. 당은 중국(唐)을 의미하고 ‘케’는 제주도 지명에 많이 붙는 작은 지역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중국과 교류하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당케’는 또 하나의 옛 도로명, 즉 ‘몰질’과 통합니다.
몰질, 말의 길, 말이 다니는 길, 말을 몰고 다니는 길.
몽골(元)제국은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고 100년을 통치했으며, 제국의 14개 국립목장 중에 하나가 제주에 설치되었습니다. 한라산 기슭에서 키워진 말이 중국으로 수송되었던 포구 중 하나가 이곳 당케이고, 그 말들을 포구까지 몰아 이동하던 길이 ‘몰질’입니다. 원이 퇴각하고 말 반출이 중지되었지만 사람들은 이 길을 해방 이후까지 주요 도로로 왕래했고, 지금은 가시덤불로 덮였지만 여전히 ‘몰질’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지역에는 또 하나 더 시간의 마디가 박혀 있습니다. 이 몰질을 벗어나 왼쪽의 다레오름과 오른쪽의 군산기슭으로 5백 미터쯤 더듬어 올라가면 입구가 허물어지고 잡초에 막힌 많은 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뚫어놓은 진지 동굴들입니다.

일전에 오키나와를 구경한 적이 있는데, 미군이 상륙하면서 동굴 속에서 수많은 일본군과 민간인이 죽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미군이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제주도에 상륙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일본군이 굴을 팠다는 것은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이 무지하게 좋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걷는 즐거움을 느끼는 절벽 위 오솔길

제주도에서 한 번 걸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슨다리’는 매력적입니다.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해변길이 아니라 솔잎이 수북이 깔리고 돌덩이가 뒹굴고 가시덩굴이 옷소매를 끌어당기고 이름 모를 야생화가 지천으로 손짓하는 오솔길을 걸으며 바다를 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조슨다리’는 아직 남아 있는 제주도 최고의 트래킹 코스라 할 만합니다.

단체로 걷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가, 연인끼리, 어머니와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또는 한 가족이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길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