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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도시를 폼 나게 해준 ‘눈꽃’
노경아 2024년 01월 29일 (월) 00:43:15

#1. “야들아, 마카(모두) 창밖을 봐봐. 눈이 무습게(무섭게) 내린다야. 와~ 하마(벌써) 발목까지 빠지겠는데. 게따가(이따가) 연화산 올라가서 썰매 탈 아들은(애들은) 여여(여기여기) 붙어라!”
“나! 근데 반장, 우리 집엔 비료포대가 없어. 난 니 뒤에 붙어 타면 안 되겠나?”
“간나야(계집애야), 그럼 니는 검은 봉다리(봉지) 깔고 타. 남자가 우타(어떻게) 간나랑 같이 타나?” 
“지랄한다, 지랄해~ 뭐뭐 머스마(남자애)가 여자랑 같이 타면 뭐이가(뭔가) 떨어지기라도 한다 하드나? 순덕이 저 간나 봉다리 깔고 타다 궁디 다 나가믄 니가 책임질끼나?”
“내가 왜 저 간나를 책임져야 하는데. 하여간 이 간나는 맨날 말을 무습게 해.” 

980년대 강원 태백엔 눈이 자주 아주 많이 내렸어요. 왔다 하면 무릎까지 쌓였죠. 어른들은 기나긴 겨울 날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태백 아이들은 놀 생각에 눈이 반짝거렸어요. 비료포대에 앉아 썰매 타는 즐거움은 도시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거든요.

   
  어린이들이 눈 쌓인 언덕에서 비료포대 썰매를 타고 있다. 추위에 얼굴과 손이 벌겋게 얼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표정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날도 학교 뒤 연화산에 올라 날이 어둡도록 눈썰매를 탔어요. 달랑 비료포대 하나에 몸을 싣고 발뒤꿈치로 방향을 바꿔 가며 산 아래로 쌩쌩 내려갔어요. 남자아이들은 한두 번 타고 나서 눈길이 생기면 두세 명이 붙어서 속도를 더하며 신나 했어요.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이들은 비료포대에 발을 딛고 서서 내려갔어요. 그 균형 감각을 잘 계발했다면 세계적 체조선수가 나왔을지도 몰라요. 참, 순덕이는 어찌됐냐고요? 내 비료포대를 둘이 번갈아 가며 탔어요. 열 살 남짓 한 초등학생들이 뭘 안다고 간나, 머스마 하며 멀리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귀엽기 그지없습니다. 

비료포대 썰매 좀 타 본 사람이라면 알 거예요. 돌부리나 잘린 나뭇가지에 엉덩이를 찧었을 때의 그 아픔을요. 어쩌다 큰 돌부리에 걸리면 엉덩이를 감싸고 데굴데굴 굴렀죠. 그것도 잠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다시 비료포대를 들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어요. 엄살이 심한 나도 눈에 바지가 푹 젖을 때까지 썰매를 탔으니까요. 그러다 집에 오면 엉덩이가 욱신거려 제대로 앉지도 못했어요.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밤새 비료포대마다 지푸라기를 가득 넣어주셨어요. 

#2.“아부지, 닭집 아저씨네 막내아들은 양쪽 날개에 발을 올리고 서서 썰매를 타요. 허리까지 오는 긴 막대기로 얼음을 막 지치면서 나한테 메롱 하곤 휙 앞으로 가요. 얼매나(얼마나) 빠른지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나도 서서 타는 썰매 갖고 싶어요. 바닥에도 철사 말고 부엌칼 심은, 날개 달린 썰매 만들어 줘요.”
“평평한 땅에서도 맨날 넘어져서 코가 깨지는 두두두두둥자가 서서 썰매를 탄다고? 닌(넌) 안 돼. 아부지, 둥자는 위험하니까 제 거 하나만 만들어 주세요.” 

‘둥자’는 장난에 잘 속아 넘어가고 약지 못한 데다 행동까지 굼떠 붙은 내 어릴 적 별명이에요. 지금 생각하니까 한자 ‘둔자(鈍者)’에서 따온 말 같아요. 작은오빠는 둥자도 아닌 ‘두두두두둥자’라고 노래처럼 부르며 놀렸어요. 그날 아버지는 “경아 놀리는 녀석이 있거든 빠르게 쫓아가서 혼내 주거라”라며 썰매를 만들어 오빠에게 주셨어요. 바닥에 부엌칼이 박힌 날개 달린 썰매는 KTX급 속도를 냈어요. 얼음 위 칼바람에 얼굴이 벌겋게 얼고, 손발은 시렸지만 하루해가 어찌 가는지도 모르게 썰매를 지쳤어요. 

탄광 도시 태백을 폼 나게 해준 것은 눈과 얼음이에요. 눈꽃은 태백의 중심 황지연못에도 피어나고, 광업소 근처 검은 땅에도 내려앉고, 백두대간에 안긴 태백산 주목에도 일렁거렸죠. 광업소가 잘 돌아가던 시절, 산도 거리도 물도 검었지만 겨울 동안만큼은 눈으로 하얗게 빛났어요. 어린 우리는 겨울이 좋았고, 늘 겨울을 이야기했어요. 

지금도 태백 개구쟁이들은 겨울 놀이를 즐기고 있을까요. 태백산, 연화산에서 비료포대 썰매를 타고, 얼어붙은 냇가에선 얼음 썰매를 지치며 속도 경쟁을 할까요. “고려 적 이야기하고 있네. 요즘 아들은(아이들은) 학원 다니느라 마이(많이) 바빠. 설사 시간이 나도 컴퓨터 게임이나 즐기지 밖에선 안 놀아. 우리 때랑은 달라도 마이 달라.” 태백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말합니다. 세월이 흘렀으니 놀이가 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태백의 겨울은 여전히 눈꽃으로 빛나니까요. 그 시절 젊은 아버지의 모습도, 촌스럽지만 귀한 추억도 내 가슴속에 남아 영원히 반짝일 테니까요. 우리, 태백산으로 비료포대 썰매 타러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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