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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가 남긴 것
신아연 2008년 06월 17일 (화) 15:59:44
브리즈번을 떠나 시드니로 옮겨온 후 이삿짐을 풀다말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짐을 싸던 날부터 비가 추적이더니 이사 나가던 그 다음 날도, 짐을 보낸 후 시드니 행 비행기에 몸을 싣던 또 그 다음 날에도 , 그리고 짐을 풀고 있는 지금까지도 계속 빗 속에 갇혀 있습니다.

연일 비가 오는 통에 온통 젖은 낙엽으로 뒤덮인 늦가을의 시드니 정취는 우수와 연민을 절로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그렇다 한들 짐 정리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잡다한 일들이 처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라 계절적 감상에 젖어들 잠시 잠깐의 한가한 틈도 없습니다.

하지만 묵은 짐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십 수년전 친정에서 보낸 편지는 쉴 새없이 이사 박스를 풀고 있는 손놀림과는 별도로 아릿한 상처처럼 가슴 한 켠에 똬리를 트는 듯한 느낌입니다.

빛바랜 상자에서 무심코 꺼내든 편지는 호주로 이민을 떠났던 92년 7월이 조금 지나 아마도 친정 어머니로부터 처음 받은 내용인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진원이 엄마 보아라, 목소리라도 한번 듣고 싶어도 요금이 싼 시간을 골라서 하려니 잠들었을 것 같고, 일요일은 집에 없을 것 같구나. 그러니 네가 한번 적당한 때에 이리로 해 보거라.
…….
우리 진원이 얼른 영어도 배우고 친구도 생겼으면 좋겠다, 할미 편지를 읽을 수 있다면 따로 편지를 보내도 좋으련만, 사랑한다고 전해 줘라…. 너도 속 좀 툭 털고 마음 맞는 친구를 두도록 해 보아라, 화 나는 것 누구에게 내뱉으면 속 시원하다, 너무 참으면 병된다…. 며칠이면 추석이구나, 거기도 한국 사람끼리 추석이라는 걸 아는지 …. ‘

그맘 때 작은 언니가 보낸 편지도 있었습니다.

‘우편물을 매일매일 뒤적이다가 오늘에야 네 편지를 받았다. 정확히 보름 만에 온 거구나. 언니, 엄마하고 통화 할 때마다 조금이라도 네 소식 (새로운 것) 을 들으려고 서로들 알고 있는 얘기를 몇 번씩이나 나열하곤 한단다….
우리 모두는 항상 네가 마음에 걸린다는 것 잊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가능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결혼한 여자가 갖는 친정 식구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야 달리 설명을 보탤 것도 없지만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난 막내 딸과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 가득한 해묵은 편지는 16년이 지난 지금, 무슨 회한처럼 가슴에 알싸한 통증을 일으켰습니다.

세월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는 말도 생각나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서러워하거나 노여워 말라는 따위의 구절도 공연스레 떠올랐습니다.
무심코 흐르는 시간속에서 소녀가 중년 부인으로, 그리고 노파로 변해가는 ‘잔인함’처럼, 외국으로 홀연히 떠난 피붙이에게 살뜰한 정과 안쓰러움, 다사로운 격려를 전하던 순간들이 세월에 묻혀 흔적 없이 흩어져 버린 듯 안타까움만 남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몇 통의 편지를 뒤적이다보니 열심히 산다고 살았건만 친정붙이의 진정어린 소망과는 한참 멀어져 버린 제 현실이 쓰라린 배신의 고통처럼 다가왔습니다.

잘 해보려는 의지와는 아랑곳없이 왜곡되고 뒤틀리는 결과와 그럼에도 그 결과에 대한 선연한 책임, 속수무책 휩쓸리는 운명의 강간과 할큄, 얼토당토않게 반복되는 같은 실수와 발등 찍는 좌절 등 인간 실존의 온갖 양태에 일평생 속임을 당하다 지쳐 나가 떨어지는 것이 결국 인생인가 싶어서 지금껏 무척 울적합니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길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을 터득하는 나이가 되다보니, 이제는 자기 앞의 생을 그대로 껴안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십 수년 후에는 적어도 이렇게 가슴아프게 하는 사연은 접하지 않아도 될테니 그것에도 적이 마음이 놓입니다.

왜냐하면 그 옛날과 달리 국내 통화만큼 싼 국제 전화 요금과 이메일로 인해 가족들과 더 이상 육필의 편지를 주고 받지 않은 지가 벌써 여러 해 전이니까요.

신 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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