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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고등학교는 마쳐 주렴’
신아연 2008년 09월 09일 (화) 07:07:59
지난 주 한국 뉴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비율이 올해 84%에 육박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학력 인플레' 현상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가도 너는 가지 마라’고 할 수는 없는,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대학은 일단 나오고 봐야 한다’는 쪽이니 누군들 뭐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때에 호주에서는 고등학교 졸업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정부 방침이 전해졌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방침’이라기보다 '제발 고등학교까지는 마쳐 달라’는 일종의 대국민 호소에 가까운 처방입니다.

현재 호주의 고등학교 졸업률은 75%에 불과합니다. 이를 2020년까지 9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로 미성년 자녀들, 특히 고등학생 자녀들을 학교에 제대로 보내지 않을 경우 부모들의 복지수당을 삭감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은 것입니다.

자녀들의 무단 결석을 방관하는 부모들은 정부에서 지급하는 생활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대학을 나와야 사람 구실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이 나라 정부는 적어도 고등학교는 마쳐야 국민 소양을 높이고 국가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고급 기술 습득을 위한 기본 자격을 비롯해서 당장은 아니라 해도 미래의 대학 진학을 위해서 고등학교 졸업장은 따두는 대비가 필요하다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미성년 자녀를 둔 저소득층 가정에서는 정부에서 나오는 양육비로 가계에 적잖은 보탬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녀가 많은 가정일수록 ‘애들 덕에 먹고 산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애들이 아직 어려서 교육비가 많이 들지 않을 때는 자식이 서넛만 되면 정부에서 나오는 돈으로 부모까지 얹혀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실이 이러니 돈으로 조종 내지는 압박하는 치사한 방법을 써가면서까지 고등학교를 마치게 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가상합니다.

하물며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멀쩡한’ 사회이니 대학 진학률이야 30~40% 정도에 그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한국식으로 올해 고 3인 제 아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글을 쓰고 싶어하는 제 아들은, 그렇다면 구태여 대학에 갈 필요가 있겠나 하고 고민하더니 고전 영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며 마음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공립학교를 다니는 탓도 있겠지만 주변의 친구들도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기보다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경우가 절반쯤입니다. 함께 다니는 친구 녀석은 얼마 전부터 배관 기술을 익히기 위해 공사 현장을 따라다닌다고 했습니다.

일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비록 ‘데모도(보조기능공)’ 지만, 견습과정이 끝나고 나면 집짓고 건물 짓는 곳에 수도나 가스, 하수 설비를 하는 일이 자신의 장래 직업이 될 것이라며, 묻지도 않았건만 배관공(plumber)으로서의 미래의 꿈을 당당하고 야무지게 피력했습니다.

그 친구는 새벽 6시면 도시락을 싸들고 공사 현장으로 달려가 오후 늦도록 일을 배운다며, 2년 실습과정을 마치고 자격증을 따려면 새벽잠의 유혹을 떨치고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 친구의 최종 학력은 중졸이지만 배관공이 되는 데는 문제될 것이 없는 학력입니다. 잠깐 말씀드리자면 이 나라는 배관공의 수입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언뜻 막힌 하수도나 변기 따위를 뚫는 일 정도로 생각되지만 노동자의 나라 호주에서는 선망되는 고소득 블루 칼라 직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나라 젊은이들은 대학을 안 나와도 먹고 살 방도가 마련되고, 하물며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이런저런 기술을 익혀 생계를 꾸릴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배울 모든 것은 중학교에서 배웠노라’ 며 일찌감치 사회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아들애의 친구 중에 판사 집 아들이 있습니다.

직업에 대한 귀천이나 차별의식이 없달 뿐 아무나 판사 되기 어렵기는 이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판사 씩’이나 되는 아비를 둔 자식이, 그것도 장남이, 말하자면 친구 아이의 형이 대학을 가지 않고 스파게티 집 ‘시다바리’로 들어갔다는 게 아닙니까.

고위직에 있는 부모 체면 생각해서라도 아무데나 ‘대학’자 붙은 데는 들어가 줘야 할것 같았는데 일찍이 요리에 뜻이 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요리 학원에 등록을 했더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번듯한 대학을 못 갔으니 부모가 지지리도(?) 속상했겠구나.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하라고 다그치는지도 모르지. 판사 아버지에 주방 보조 아들이라니..’

그 때의 제 속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인지요. 본인의 꿈이 정말로 요리사가 되는 것이라면 아비가 판사 아니라 대통령이라 한들 가고 싶은 제 길을 못 갈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내 갈 길 갈 때 가더라도 일단 대학은 나오고 보자’는 한국의 세태와, ‘제 갈 길 갈 때 가더라도 일단 고등학교는 나오게 하고 보자’는 호주 정부의 갈등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신 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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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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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익 (211.XXX.XXX.129)
신아연 님다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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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5 10: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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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섭 (118.XXX.XXX.170)
신 선생님의 글 감동적으로 잘읽었습니다.저는 나이가 좀 되어서 아이들을 모두 대학과정과 출가를 마친 처지이면서도 항상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고싶습니다. 왜 하기싫은공부를
억지로하게하고 하고싶은 일은 부모의 채면때문에 자식의 길을 막거나 돌려야하는지요.
부모는 우등생이 아니었으면서도 자식만은 1등을 위해서 별짓을 다하는 부모가 안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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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1: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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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회 (119.XXX.XXX.228)
고학력이 나쁠리야 없지만 실제 알맹이도 없이 학력이 부풀려져 있는 현실은 문제라고 봅니다. 그 바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능직은 사람이 없어 애태우고, 대졸들은 이태백이란 용어까지 나온 현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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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0 10: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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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회 (119.XXX.XXX.228)
저도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말 우리글'이란 책을 읽고 반성 많이 했습니다. 정작 우리 스스로가 우리 말과 글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 그 뒤부터는 '...에 있어서'란 표현, 입장이란 단어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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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0 09: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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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열 (211.XXX.XXX.129)
그런데 63년생인 멋진 글을 쓴 사람이 언제 어데서 "데모도''시다바리'란 일본말을 알게되었는지, 우리 사회에서도 '시다''앗사리란 일본말이 어느나라 말인지도 모르고 쓰고있는 현실이 새삼스럽게 씁씁하게만 여겨지느군요.감명깊게 가슴에 스며드는 글을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이런 군더더기같은 글을 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거든 시드니의 승원홍 한인회장에게 물어 보십시오. 서울에서 유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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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9 22: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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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열 (211.XXX.XXX.129)
아르다운 시드니 항구를 자랑하는 호주, 자연은 놀랍게도 넓었다.지루하기도 지나치게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면 머리를 식히고 싶은 곳을 발견 한 것이마음이 후련해지기기만 한다.정성껏 길안내를 해준 가이드에게서 배관공이 호주에서는 일등 실랑이라는 말을 들었느데, 오늘 그 이야기를 글로 읽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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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9 22:3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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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임 (211.XXX.XXX.129)
ㅎㅎ 나라마다 세태가 다 다르군요.그래도 학력 스트레스 없이 자기가 하고싶은 일하며 먹고살만큼 살 수 있는사회가 부러워요. 공부 스트레스에 치여서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는 우리 아이들이 더욱 불쌍하지요.내 아들 딸이 그런다면 다 받아주고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 사회속에서 살아야하니 이 세태를 완전 무시할수도 없죠.암튼 어떤 사회가 됐던지 자기가 하고싶은 일 하면서 사는사람들은 행복한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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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9 17: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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