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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
김이경 2008년 09월 18일 (목) 01:53:26
추석 연휴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하기 싫은 숙제를 해치운 아이처럼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심보 고약한 저만이 아니라 남편도 그렇고, 시댁과 친정 식구들도 그렇고, 주위의 친구, 선후배, 이웃집 부부들도 다 그런 얼굴입니다. 그깟 전 좀 부치고 뭐 그리 유세냐고 눈을 흘기는 어머니나, 이래야 형제간에 얼굴이라도 보지 않느냐고 혀를 차는 아버지에게는 딱한 세태이지요.

차례상을 물리기 무섭게 일어설 차비를 하는 자식들을 보며 부모는 입이 씁니다. 힘들여 먹이고 입혀 가르쳐 놓으니 다들 제가 잘나 큰 줄만 알고, 툭하면 부모 탓이나 합니다. 서운함이 목까지 치밀고 인생이 허무합니다. ‘차라리 저 하늘의 새처럼 훨훨 날아갔으면…’ 혹 그런 맘이 드신다면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를 읽어보십시오. 저 하늘의 새도 천륜의 짐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음을 알게 되실 겁니다.

4월 어느 날, 생명과학자 김성호는 청보리 넘실대는 지리산 기슭을 더듬다 우연히 한 나무에 눈길이 머뭅니다. 요즘은 보기 힘든 큰오색딱따구리가, 윗부분이 부러지고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진 “죽어가는” 나무에 구멍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김성호는 큰오색딱따구리가 둥지를 짓고 알을 품고 새끼를 키우는 앞으로의 날들을 함께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책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50일간의 관찰기입니다. 새벽 너덧 시부터 해질녘까지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1.5m 미루나무 꼭대기의 작은 새 둥지를 바라보는 생활이 계속되는데, 어지간한 사람은 일주일도 버티기 힘든 무미건조한 나날입니다. 관찰 3일째 일기를 볼까요?

“새벽 05:20_ 둥지를 튼 나무에 도착합니다.… 둥지는 비어 있고 계곡을 떠나 흐르는 물소리가 지리산 자락을 채웁니다.
06:15_ 암컷이 먼저 둥지를 찾아옵니다.… 힘이 드는지 나무 부스러기를 던지고 나서는 고개를 내밀고 잠시 쉬기도 합니다.
07:20_ 수컷이 날아와 교대합니다.…
15:30_ 강의가 끝나고 다시 둥지를 튼 나무에 도착합니다. 수컷이 고개를 내밀어 나무 부스러기를 던집니다.
16:10_ 암컷이 와서 교대를 합니다.
16:55_ 수컷이 날아와 암컷과 교대를 합니다.
17:35_ 수컷이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듯합니다.
19:35_ 둥지를 떠난 수컷과 암컷이 다시 오지 않습니다.…”

295쪽에 걸쳐 이런 식의 관찰일기가 계속됩니다. 십여 일은 새끼를 키울 집을 짓고, 십여 일은 알을 품고, 또 한 달은 태어난 새끼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는, 매일 매일이 어슷비슷한 나날입니다. 특별할 것도 드라마틱할 것도 없는 일상인데, 저자는 좀스럽다 싶을 만큼 꼼꼼하게 기록합니다. 그래서 지루할 것 같지만 이상하게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하기야 지루함은 반복이 아니라 반복을 대하는 마음에서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일상의 반복을 의미 있다고 믿는 마음에는 아무래도 지루함이 깃들 틈이 없겠지요. 큰오색딱따구리 부부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아는 모양입니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꾀부리지 않고 성심을 다합니다. 그걸 지켜보는 저자도 마찬가지고요.

머리가 울리도록 나무를 쪼아대고, 까치의 눈을 피해 알을 품고, 온 산을 돌며 먹이를 구하는 하루하루를 묵묵히 견디면서 큰오색딱따구리는 부모가 됩니다. 온몸을 바치는 헌신이지요. 하지만 큰오색딱따구리가 보여주는 부모 노릇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산란한 지 33일째, 밤이 깊어도 아빠 새가 둥지를 찾지 않습니다. 그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새끼들을 돌봐온 아빠입니다. 웬일일까? 뒤늦게 저자는 아빠 새의 마음을 깨닫습니다. 새끼들을 더 넓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홀로서기를 가르치기 시작한 거지요. 이제 새끼들은 아빠의 체온 없이 긴 밤을 견뎌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엄마와 아빠는 먹이를 먹여주는 대신 눈앞에 들고 와 약만 올립니다. 새끼들이 배가 고파 울어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선 어미 새가 더욱 엄격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개체수가 줄어드는 엄혹한 환경에서 생명을 부지하려면 이런 담금질이 필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별의 날이 옵니다. 한 번 헤어지면 보름달이 떠도 새해가 밝아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영이별입니다.

“관찰 50일째. 12:55_ 아빠 새는 일곱 번째 미루나무 전체를 돌아다니며 둘째를 찾고 있습니다. 벌써 네 시간째입니다. 아빠 새가 첫째와 둘째를 키운 정성을 잘 아는 나는 아빠 새가 더 이상 오지 않을 때까지 미루나무 곁에 함께 있어주기로 합니다.… 부리에는 네 시간 전에 물고 왔던 먹이가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는 포기하는 모양입니다. 주위를 한 번 찬찬히 둘러보더니 그렇게 홀연히 먼 북쪽 산을 향해 날아갑니다.”

한참 뒤에 돋아날 나뭇잎 모양까지 미리 계산해 둥지를 짓고 새끼를 키운 아빠입니다. 그리 애지중지하던 새끼의 홀로서기를 배웅조차 못한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마는, 부모 노릇이 거기까지인 줄을 알고 돌아설 뿐이지요. 사랑이 다해서가 아니라 더 넓게 사랑하라고 돌아서는 마음, 큰오색딱따구리에게서 생명을 기르는 큰마음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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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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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아연 (123.XXX.XXX.28)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애잔한 글입니다. 내 몫을 다한 것을 깨닫고 홀연히 북쪽산으로 떠난 부모새처럼, '이만 하면 됐다'며 일어나 제 길을 가게 될 날을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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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9 07:21:43
0 0
기웃기웃 (211.XXX.XXX.37)
키워서 내보내는 것. 자연의 이치대로 사는 것. 외로움을 감수하는 것.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08-09-18 19:14:3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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