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울의 ‘쑥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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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의 ‘쑥대머리’

황경춘

2008년 09월 27일 (토) 07:27:25


	임방울(1904~1961)

대표적 판소리 명창 임방울(林芳蔚ㆍ1904~1961) 선생을 기념하는 제 16회 임방울 국악제가 22~24일 그의 고향인 광주에서 열렸습니다. 임방울 하면 생각나는 것이 “쑥~대머리”로 시작되는 그의 구수한 춘향(春香)의 옥중가입니다. 이 온 국민이 사랑하는 판소리에 관련된, 제가 혼자 70년 동안 마음속에 묻어 온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저의 선친은 시쳇말로 좀 ‘끼’가 많으셨던 분으로 국악을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특히 장고는 많은 사람이 탄복할 정도의 솜씨였고, 우리도 어릴 적에 동네 환갑잔치 등에서 신명나게 노시던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 집엔 시골에서는 드물게 유성기가 있었습니다. 판소리나 민요 가요만담 등의 판이 많이 있어 아버지는 한가하실 때 판소리를 들으시며 흥겹게 장단을 맞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셨습니다.

그 판들에는 송만갑 임방울 이화중선 같은 당시 명창들의 노래가 들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저는 가요만담 같은 것은 간혹 들었지만 판소리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판소리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중학(지금의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열일곱 살로 중국대륙에서 일본군의 침략전쟁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던 1940년의 일입니다.

방학이 시작되자 집단합숙으로 열흘 동안 근로봉사에 동원된 뒤 배고픔과 극도의 피로에 지친 몸으로 버스와 순항선을 번갈아 타고 반나절 걸려 경남 남해 섬의 고향 집에 돌아갔습니다. 사춘기의 여러 가지 고민, 곧 결정해야 할 상급학교 진학문제, 게다가 합숙 도중에 들은 다급한 시국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머리가 혼란해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이상하게도 유성기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이 임방울의 ‘쑥대머리’였습니다. 그의 폐부를 찌르는 듯 구성지고 호소력 있는 판소리는 한문구절이 많아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어딘가 지친 마음을 매혹시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잠재해 있던 민족혼이 자극된 모양이라고나 할까요.

레코드 재킷 속에 들어 있어야 할 노래말의 설명서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쑥~대머리”로 시작되는 도입부가 어찌나 가슴을 흔드는지 엉뚱하게도 우선 이것만이라도 배워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지금처럼 녹음기나 CD로 반복해 들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유성기는 강철로 된 바늘을 한 판 돌릴 때마다 새 것으로 갈아야만 판을 손상시키지 않고 판에서 나오는 잡음을 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벌써 전시 하의 물자부족으로 생활필수품이 아닌 유성기 바늘 같은 것은 상당히 귀했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기는 좀 망설여졌습니다. 게다가 이 판소리의 곡조는 그 당시의 소년에겐 따라 하기가 퍽 어려웠습니다. 얼마 동안 반복해 연습하고 종이쪽지에 노래말을 적어 방학이 끝나 하숙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끔 낮은 소리로 반복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때 뜻은 잘 모르면서 어설프게나마 외우고 있었던 저의 ‘쑥대머리’의 도입부는 남 앞에서 불러 볼 기회는 물론 없었고, 다만 제 가슴속에서만 가끔 흥얼거리며 뒤숭숭한 마음을 잠시나마 잠재워 보는, 그런 판소리 한 토막이었습니다.

나라를 되찾은 1950 년대 후반, 당시 공보처에서는 유독 국악 진흥에 힘을 기울여 운현궁 근처에 전용 공연장까지 만들어 정기 공연도 가끔 열었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위해 표를 구해 몇 번 모시고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임방울 선생은 생존하셨지만 공연을 직접 보지는 못 했습니다. 그러나 국악에 대한 흥미는 나이 들면서 점점 더해가 특히 황병기 교수의 가야금 연주는 몇 번 가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임방울 국창이 돌아가신 지 10여년 후, 아마 1970 년대 중반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신문인가 잡지에서 ‘쑥대머리’에 관한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30 년 전 중학생 시절 외웠던 ‘쑥대머리’ 도입부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엉터리였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노래말은 “쑥대머리, 구신헤용 금박옥방의 잠자리에…보고지고 보고지고…” 대충 이랬습니다. 임방울 명창의 ‘구신’ 발음은 경상도 서부 사투리와 비슷해 곧 ‘귀신’이라고 알아챘지만 ‘헤용’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채 그대로 암송만 했을 뿐 아니라 ‘金箔玉房의 잠자리’라고 외웠던 대목은 전연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제 기억이 엉망이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메모는 해 놓지 않았는데 최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쑥대머리’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쑥대머리, 귀신형용(鬼神形容) 적막옥방(寂寞獄房)의 찬 자리에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漢陽郎君) 보고지고….“

물론 일제강점 말기라 학교에서도 조선어과목은 이미 폐지되고, 서편제 동편제도 모르는 경상도에서 <춘향전>이라고는 5전(錢) 짜리 조잡한 이야기책을 읽은 것이 저의 지식의 전부였습니다. 저는 ‘쑥대머리’가 춘향전의 옥중가인 줄도 몰랐고 그저 소리나는 대로 상상해서, 그것도 경상도 사투리로 외우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춘향이가 금박옥방(金箔玉房)의 사치스런 기방(妓房)에서 로맨틱하게 한양에 있는 이도령(李道令)을 사모한다는 180도 정반대의 상황을 상상하며 ‘쑥대머리’ 도입부를 배우고, 그 뒤 오랜 세월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방울 국창과 그를 지극히 흠모(欽慕)하신 선친께 죄송한 마음 간절하나 뒤늦게나마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았다는 것은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임방울 선생을 소재로 한 소설을 많이 썼고 두 달 전 타계한 작가 이청준의 유해를 고향 장흥에 묻기 전의 노제에서 이 ‘쑥대머리’를 이지선 명창이 구성지게 불러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는 기사를 읽고 새삼 ‘저의 쑥대머리’ 생각이 떠올라 이렇게 이실직고(以實直告)하는 바입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고영회 (119.XXX.XXX.228)

어릴 때는 뭔 말인지도 도대체 알 수 없었던 말들이 자라면서 알게 되는 게 많았습니다. 서짓골->書齋골, 거무재->去馬재(말을 타고 넘는 고개), 심지어 새몰->새말(새마을)... 그러니 노랫말에 들어있는 단어야 더욱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많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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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30 10: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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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장춘 (121.XXX.XXX.35)

이실직고 잘 읽었습니다. 언제쯤 한 번 쑥대머리 병창을 이 칼럼 쓰시는 분들과 함께 들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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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7 20: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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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익 (121.XXX.XXX.35)

김승웅글방에서도 자주 뵈었지만 참으로 존경스런 글입니다. 보배스러운 존재이신 선생님 부디 건강하시고 좋은 글 오래 써 주세요. 저도 이제 시덥잖은 잡문이라도 가끔 올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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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7 20: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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