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임철순 담연칼럼
     
내 안에 있는 것들
임철순 2008년 09월 29일 (월) 00:27:24
요즘 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불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남들이 다 가고 싶어하는 직장에 들어가고도 하루아침에 때려 치우고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하거나 외국여행을 떠나고, 대학을 졸업한 뒤 전공을 바꿔 1학년부터 다시 대학에 다니기도 합니다. 무슨 큰 자랑이라도 되는 듯이 어느 날 “엄마, 나 학교 그만뒀다”하고 말한 여대생도 있습니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을 듣고 자라온 세대에게는 생소하고 납득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과거에도 그런 사람은 많았습니다. 내 친구 하나는 사회생활 초년기인 1970년대부터 10여년 동안 수시로 직장을 바꿨습니다. 만날 때마다 새로운 명함을 주곤 해 내가 오히려 혼란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또 한 친구는 수없이 직장을 전전하다가 출판사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을 너무 많이 주어 거기에 안주할 것 같다는 이유로 또 그만두고, 신문사를 거쳐 방송사 PD가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래 전부터 꿈꿔온 ‘딴따라판’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예전에는 일종의 예외였지만, 이제는 일반적인 현상이 된 셈입니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노마디즘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을 노마드족이라고 하는데, 정착민이 되기를 거부하는 유목의 삶은 현대사회의 문화ㆍ심리 일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 행위’라는 개념에 생각이 미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노마드가 돼야 할 것 같습니다.

25년 넘게 방송현장을 누비던 이긍희(62) 전 MBC 사장이 화가로 데뷔해 10월 2~8일 첫 개인전을 연다는 기사가 며칠 전에 나왔습니다. 학교 다닐 때 그림대회 입선은커녕 미술반에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그는 4년 전 미술가인 신부님이 캔버스와 화구를 선물하며 그림을 권유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살아있는 것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내 그림의 가장 큰 주제”라는 이씨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 묘미에 빠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방송과 미술은 창조적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집단적이고 시스템적인 방송과 달리 미술은 개인적이고 표현이 자유로워 캔버스와의 대화에 빠지는 행복감이 크다는 것입니다.

시인 문희자(76)씨는 8년 전 남편 몰래 그림공부를 시작해 3년 전 대한민국 회화대상전에 특선 입상한 데 이어 각종 미술전 출품, 개인전 개최 등으로 새로운 이력을 쌓은 유명 화가가 되었습니다. 남편과 자식들의 사회적 성공은 흐뭇했지만 ‘내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년 퇴임 이후의 해방감과 허무감이 뒤섞여 있을 때 만난 그림의 세계는 그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숨어 있는 색을 발견하는 눈이 생겼다. 난초 잎에도 녹색 이외의 색깔들이 오묘하게 섞여 있더라. 늦게나마 그림을 배우면서 이제껏 못 보던 세계를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을 잇는 ‘관계’라고 합니다.

그와 가장 가까운 관계인 남편은 음악가로 한 평생 살다가 65세에 소설가가 된 이강숙(72)씨입니다. 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지낸 피아니스트, 음악평론가, 교육행정가인 이씨는 대학에 다닐 때 폐결핵에 걸려 2년 휴학하는 동안 평생 불치의 문학병에 걸렸습니다. 음악을 하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오래 간직하고 살다가 환갑도 더 지나 소설가로 데뷔했습니다. 숙명여고의 음악교사와 국어교사일 때 알게 된 남녀는 처음엔 음악과 문학으로 만나 이제는 문학과 미술로 새로 사귀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는 새로운 부부가 되었습니다.

매년 노벨문학상이 발표될 무렵이면 더 주목을 받는 시인 고은(75)씨는 얼마 전 그림과 글씨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다고 합니다. 몇 가지 시 작업을 마치는 대로 유화를 본격적으로 그릴 예정이라는 그는 “화면 전체를 여지없이 채우는 관능적 충만이 내 그림의 꿈”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아내가 내년쯤 화실을 지어준다고 약속했다는 자랑도 했습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한동안 한국의 전통 산수나 문인화를 멀리할 것”이라며 “이런 태도는 동과 서의 편향 문제가 아니라 나의 자유”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어령(74) 전 문화부장관은 등단 50년이 되는 해였던 2006년에 시인으로 데뷔했습니다. 결국 시인이 되기 위해 50년 동안 글을 써왔다는 그에게 시는 미당의 전복과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서정주의 <시론>이라는 시는 ‘바다 속에서 전복 따 파는 해녀도/제일 좋은 건 님 오시는 날 따다 주려고/물 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고 돼 있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아까워서 하지 못하다가 이제 그 전복을 따려고 물 속에 들어간 셈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래 전에 써둔 시로 데뷔했고, 두 달 전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집을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지난해 7월 기독교 세례를 받고 신앙인의 삶을 새로 시작한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습니다.

치과에 가면 “평균수명이 길어져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텐데, 치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은 결국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만 있으면 뭐합니까?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지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새로운 꿈을 가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고은은 “나의 오늘은 나의 어제가 베풀어준 은혜가 아니라 나의 내일이 유혹하는 꿈의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내일의 유혹을 찾아 자기 내부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8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강희양 (211.XXX.XXX.129)
다양한 내용의 좋은 글이기에계숙 추천할 겁니다, 자유칼럼그룹은 제가 참석하는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고영희 변리사가 저에게 추천한 건전한 메일입니다
답변달기
2008-10-01 09:31:24
0 0
이정규 (211.XXX.XXX.129)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많은 참고가 되었읍니다 감사함니다
답변달기
2008-09-30 08:11:01
0 0
신 아연 (123.XXX.XXX.28)
또다른 인생으로 변신을 할 수 있거나 변신의 몸부림을 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꽃 피울 수 있는 재능도 있어야 겠지만,죽을 때까지 입에 풀칠하는 문제가 일단 해결된 뒤에야 가능한 이야기일테니까요...
답변달기
2008-09-30 07:30:04
0 0
서승석 (211.XXX.XXX.129)
문득 삶이 쓸쓸해질 때, 침묵의 늪으로 도피하고 싶을 때, 예술처럼 내 존재이유를 극명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되돌아보는 자신의 삶이 허망하게 느껴지시는 분들께 어느 장르를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답변달기
2008-09-29 14:20:09
0 0
서승석 (211.XXX.XXX.129)
그래서 15년 간의 외국 생활 후 귀국해 제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문인화를 한 5년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 하고 싶었던 발레도 5년간 다시 지도도 받고... 올해는 새로운 도전으로 첼로를 시작하려했는데 여름에 우연한 기회로 광주요 도자연구원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전 제 자신이 종합예술이 되어보고자 합니다.
답변달기
2008-09-29 14:19:30
0 0
서승석 (211.XXX.XXX.129)
안녕하세요, 임철순님? 지난해 연우포럼 송년 모임 후 김세준씨 소개도 받고, 뒷풀이도 했던 서승석입니다. 늘 감동과 공감을 안겨주는 선생님의 좋은 글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전 프랑스에서 불문학을 공부했고, 시인으로 시집도 3권 냈습니다. 그런대도 그 형체가 없는 말과 싸우는 일이 가끔 너무 힘들어 그림 그리는 분들이나 음악 하시는 분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답변달기
2008-09-29 14:18:15
0 0
이달호 (211.XXX.XXX.129)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그리고 앞으로 자주 들어가서 글도 읽고 가능하다면 흔적이라도 남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아침에 뵙게되어 매우 반가웠습니다.우리 반은 건설업종에 종사하시는 분이 매우 많네요....그래서 더욱 반갑습니다.보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답변달기
2008-09-29 14:15:34
0 0
한분순 (211.XXX.XXX.129)
임주필님, 주필님도 그 빼어난 감성으로 시나 소설을 쓰시면 어떨까요.
반드시 좋은 글 쓰실 것이라 믿어집니다. 기다려 볼게요. 분순.
답변달기
2008-09-29 14:14:37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