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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속은 기특하네
임철순 2009년 01월 05일 (월) 00:31:20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의 무승부를 희망합니다. 남을 이기는 것도 싫지만 남에게 지는 것도 싫습니다. 남을 지배하는 것은 체질적으로 어울리지 않고, 그와 마찬가지로 남의 지배를 받는 것도 참을 수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 몫을 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의 내부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것을 잘 조화하면서 살아가는 게 슬기롭고 옳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和而不同(화이부동)이라는 말을 저절로 좋아하게 됐습니다. 논어 子路(자로)편에 나오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는 ‘군자의 사귐은 조화롭지만 모든 견해가 같기를 추구하지 않는 반면 소인은 같으면서도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집안 정리를 하다가 ‘和而不同’ 액자를 발견하고, 10여년 전에 붓으로 쓴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신년휘호나 가훈이랍시고 일필휘지를 한 건데, 글씨는 당연히 엉망개판이지만 스스로 용기가 가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수신문이 올해 己丑年(기축년) 희망 사자성어로 이 말을 선정하는 바람에 좀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교수들은 화이부동한 정치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정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과 똑같은 옷을 누가 입고 나오면 갑자기 그 옷을 입기 싫어지는 심리와 비슷했습니다.

교수신문이 선정하는 사자성어는 시대의 특징과 바람을 적확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신년 사자성어로 선정한 光風霽月(광풍제월)은 北松(북송)의 시인 黃庭堅(황정견)이 유학자 周敦頤(주돈이)의 사람됨을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뒤의 달’이라고 비유한 것인데, 새 정부가 출범하는 시기였으므로 세상이 맑고 밝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와 달리 연말에 선정하는 사자성어에는 護疾忌醫(호질기의ㆍ2008), 自欺欺人(자기기인ㆍ2007), 密雲不雨(밀운불우ㆍ2006), 上火下澤(상하화택ㆍ2005), 黨同伐異(당동벌이ㆍ2004), 이런 식으로 부족감과 불만이 담겨 있습니다. 차례로 말하면 병이 있는데도 숨기고 의사를 기피하고, 자기를 속이고 남도 속이고, 구름은 몰려 들었지만 비는 오지 않고, 불은 위로 치솟고 물은 아래로 가라앉으려 해 세상이 시끄럽고, 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무리의 사람들을 무조건 배격하는 시대상을 지적한 말입니다.

새해가 되자 대통령으로부터 평범한 가장까지 저마다 신년사를 발표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두드러지는 것은 올해에도 사자성어를 동원해 유식한 말을 많이 한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에 이명박 당선인은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된다는 뜻의 時和年豊(시화연풍)을 신년 화두로 내세웠습니다. 후보 시절에 旱天作雨(한천작우), 심하게 가물면 하늘은 비를 내린다는 <맹자>에 나오는 말씀을 썼으니 비가 적당히 내려 풍년이 든다는 의미로 해석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비는 당연히 이 대통령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올해 내세운 扶危定傾(부위정경)은 아주 어렵습니다. ‘위기를 맞아 잘못됨을 바로잡고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뜻인데, <周書(주서)> 李基傳(이기전)의 ‘太祖扶危定傾威權震主(태조부위정경위권진주)’에서 따온 말이랍니다.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취지라고 이해할 만합니다.

여야 대표들도 빠지지 않고 사자성어를 내세웠습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多難興邦(다난흥방ㆍ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나라를 부흥시킨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上蒼難欺(상창난기ㆍ위에 있는 푸른 하늘은 속이기 어렵다)와 分崩離析(분붕이석ㆍ나라가 나뉘고 무너지고 민심이 이탈되고 단절됐다) 두 가지를 내놓았습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는 風雲之會(풍운지회ㆍ영웅이 때를 만나 큰 공을 세운다), 민노당 강기갑 대표는 石田牛耕(석전우경ㆍ돌밭 같은 험난한 세상을 소처럼 갈아 엎는다)을 제시했습니다.

다들 어려운 말을 어디선가 잘도 찾아내 자신의 입장, 그러니까 철학과 이념을 담아 대중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장관을 비롯한 기관장들도 빠질 수 없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不狂不及(불광불급), “미쳐야 미친다”고 일을 열심히 할 것을 촉구했고,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與時俱進(여시구진)이라는 말로 “세상이 바뀌었으니 함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자”고 주문했습니다. 올해가 소의 해라서 그렇겠지만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牛步千里(우보천리ㆍ소 걸음으로 천 리 길)를 강조했습니다.

김종창 금융감독위원장은 거문고 소리가 뒤틀리면 느슨해진 줄을 조여 매야만 제대로 연주할 수 있듯이 어려울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를 담아 解弦更張(해현경장)을 말했습니다. 허용석 관세청장은 一念通天(일념통천)의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김성호 국정원장은 ‘정신을 집중해 시위를 당기면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뜻의 中石沒鏃(중석몰촉)을 국정원의 새해 화두로 내세웠습니다. 사마천의 <史記(사기)>에 나오는 중석몰촉은 漢의 장수 李廣(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이 바위에 깊이 박혔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이 분들은 평소에 잘 알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혐의를 자꾸 두게 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浩然之氣(호연지기)라고 자필로 쓴 연하장을 올해에도 변함없이 보냈습니다. 大道無門(대도무문)과 함께 그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가 이런 사자성어를 쓰면 그러니라 하게 됩니다. 한자의 세례를 받은 사랑방정치 시대의 정치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김대중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거지로 보이고 어색합니다. 유진산 전 신민당 총재의 말이 생각납니다.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40대기수론이 당내에서 대두되자 그는 口尙乳臭(구상유취),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고 일갈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등 당시의 40대 기수들은 나중에 대통령을 번갈아 했지만, 어쨌든 유진산씨는 이 사자성어를 통해 자기의 말을 했습니다. 요즘의 사자성어 남용현상을 보노라니 그 말이 생각납니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좋은 말을 하고 있지만, 어려운 사자성어에 대한 반감은 상당한 것 같습니다. 그냥 쉬운 우리 말로 하면 어디가 어떻게 되나요? 어떤 사람이 각 정당을 재미있게 사자성어로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한나라당은 外華內貧(외화내빈) 烏合之卒(오합지졸)이요, 민주당은 興盡悲來(흥진비래) 厚顔無恥(후안무치), 자유선진당은 孤掌難鳴(고장난명) 有耶無耶(유야무야)인가 하면 민주노동당은 市井雜輩(시정잡배) 螳螂拒轍(당랑거철) , 창조한국당은 漁夫之利(어부지리) 無味乾燥(무미건조)라고 비난했더군요.

이 글을 쓰다 보니 춘향가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과거급제한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가다가 한양 가는 방자를 만나 춘향의 편지를 읽는 대목입니다. 이 도령은 편지 보여 주기를 거부하는 방자에게 "이 자식, 네가 무식허다. 옛 문장에 이르기를 復恐怱怱說不盡(부공총총설부진)허여 行人臨發又開封(행인임발우개봉)이라 허였으니 잠깐 보고 다시 봉헌들 허물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급히 쓰느라 할 말을 다 못한 것 같아서 행인이 편지를 갖고 떠날 무렵에 편지를 다시 열어 본다는 뜻인데, 무식한 방자는 그 문자를 아는 척 하느라고, "아따! 거, 채린 조격보담 문자는 거드러졌네그려. 편지 줄 일은 아니요마는 당신 문자 쓰는 것이 하도 신통해서 주는 것이니 얼른 보고 주시오"라고 합니다. 바로 이 말, 생기고 차려 입은 건 영 그렇지 않은데 문자속은 기특하다는 말이 생각난 것입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말을 내세워 아는 체 하는 현상에 대해 뭔가 멋진 말로 한 방 먹였으면 좋겠는데 아는 말이 별로 없어 유감입니다. 虛張盛世(허장성세) 欺世盜名(기세도명) 기껏 이런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딱 맞는 말 같지도 않아 답답합니다. 정치인들이나 고위 공직자들에게 어려운 사자성어를 대 준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그런 서비스를 해 주는 분이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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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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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란 (211.XXX.XXX.129)
임회장님! 새해에도 상큼한 글 많이 많이 써주세요^^ 오늘 쓰신 글은 무덥고 짜증스러운 날에 시원한 냉수같았슴다. 필진 소개글과 같이 참신하고 생기 넘치는 글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길 기원드리며~ 주를 약간 줄여주십사부탁드려도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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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7 13: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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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덕 (211.XXX.XXX.129)
2009-01-05 22:52:40
참으로 좋은 글이라, 군수님께 보냅니다.군수님께옵서는 어떤 사자성어를 좋아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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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6 08: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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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백 (211.XXX.XXX.130)
이메일이 바뀌어 그동안 못읽은 칼럼을 오늘에사 다 읽고 갑니다.

주필님, 새해에도 건승하시고 한국일보에도 많은 좋은 일들이 일어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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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5 19:2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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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211.XXX.XXX.129)
ㅎㅎ 정초부터 시원합니다. 문자속은 기특헌지고라?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저는 정월 초하루에 태산에 올라 천하를 굽어 보았습니다. 세상이 작아 보이는데, 그 아래 사람들의 다툼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이건, \"말은 잘해요\" 인가요? 채길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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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5 11: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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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 (211.XXX.XXX.129)
임주간님의 글은 빼지 않고 읽는 편인데 오늘 글이 더욱 좋습니다. 지금 인터넷 세상에 남의 실력을 빌어 사자성어로 아는체 난체 하는 거짓말쟁이들 속에서 사는 삶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네요. 새해 건필하소서. 和而不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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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5 11: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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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야 한때는 한자신동 (211.XXX.XXX.129)
고등교육이 끝나고 한자를 놓아버려 어느새 한자 무뇌충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모습도 문제가 많지만
빙글빙글 눈돌아가게 어려운 한자를 쓰는 높으신 분들 숨막힙니다!
이래서야 소통이 될런지;;;; (에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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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5 10: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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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121.XXX.XXX.236)
임철순 주필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이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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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5 10: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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