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최창신 걸어서 탐라일주
     
엉뚱하게 낭패를 당할 뻔하다
최창신 2009년 01월 10일 (토) 20:11:59
걸어서 탐라(耽羅) 일주-후편(5) 

서귀포 70리 길. 신흥리를 막 벗어나 송천교를 건넜을 무렵이었다. 왼쪽 발바닥에 뭔가 넓적한 것이 달라붙어 계속 절거덕거리는 느낌이 들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럴 수가! 멀쩡했던 신발이었는데 바닥의 절반가량이 떨어져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게 아닌가. 갑자기 의표(意表)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게 어떤 신발인데 이러나? 걷거나 장거리 달리기용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신발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가볍기가 종이 같고 발의 편함이 솜을 밟고 있는 듯한 프로선수용이 아닌가. 더구나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새것인데…

   
  ▲ 서귀포에서 표선을 향해 걷는 길가엔 억새가 우거져 나그네의 울적한 심사를 달래 주었다.  
그렇다면? 아, 귀한 물건이라 하여 아끼느라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어 스스로 낡아버려 이렇게 된 게 틀림없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십수년은 족히 지니고 있던 물건이다. 한 번도 안 쓴 새것이지만 동시에 집에 있는 신발 중 가장 낡은 것이었던 셈이다.

그 순간, 너무 당황해서 그랬나? 엉뚱하게도 프랑스 파리에 있는 다리 ‘퐁 뇌프’가 떠올랐다. 실제 가 보면 그저 그렇지만 ‘퐁 뇌프의 연인들’이라는 영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곳. ‘뇌프’가 아홉이라는 뜻이 있어 ‘제구교(第九橋 )’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틀린 해석이고 뇌프에는 새롭다는 뜻도 있어 ‘새 다리(新橋)’라는 이름이다.

시테섬의 노트르담 대성당 반대편 끝에 놓여 있는 ‘퐁 뇌프’는 세느강을 가로지르는 32개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다리일 뿐만 아니라 5백년 전인 16세기에 만들어진 것. 그 옛날 강에다가 다리를 놓는 일도 쉽지 않았거니와 그렇게 육중한 돌로 아름답고 단단하게 만든 것 자체가 경이적인 일이어서 유럽인들 모두가 부러워했다고 들었다. 일본 도쿄에 있는 ‘신바시(新橋)’도 거의 같은 경우.

얼토당토않은 갖다붙임[牽强附會]이겠으나 ‘가장 새것으로 불리나 실은 가장 낡고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내 신발이나 ‘퐁 뇌프’가 같은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한가하게 웃고만 있을 일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지가 아주 난감하게 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왼쪽 신발은 완전히 못쓰게 된다. 표선(表善)까지는 5km. 그 길을 한 쪽은 맨발로, 한 쪽은 운동화를 신고 걸어야 될 판이다. 거기 도착한다 해도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살 수 있을지는 미지수. 길바닥에 주저앉아 신발 끈을 푼 다음 밑창까지 몽땅 묶었다. 밑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표선읍까지 가급적 왼발에 힘을 덜 주면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잘못하면 밑바닥 쪽의 끈이 닳아서 끊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읍내 약국에서 강력 접착제와 압박붕대, 그리고 반창고 등을 구입, 식사하면서 임시변통으로나마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사소하게 보이는 해프닝이었지만 두어 가지 중요한 교훈을 안겨 주었다. 첫째는 소중한 물건이라 해서 아끼기만 한다고 잘하는 짓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는 적어도 ‘오래걷기’를 하려면 신발과 복장, 우천 시의 대비 등에 철저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표선에서 성산(城山)까지는 멀고도 지루했다. 별다른 특징도 없는 들길과 언덕길을 끊임없이 걸어야 했다. 사람 구경도 하기 어려웠다. 중간에 신풍리라는 곳에 말(馬) 목장이 있었는데 중년부부가 한가롭게 승마를 즐기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을 뿐 모든 게 단조로웠다. 서울에서 자주 걸려오는 가족과 친지들로부터의 전화가 그나마 외로움을 달래주기는 했으나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야 하는 걷기의 맥을 끊어놓아 번거롭기도 했다.

워낙 단조롭고 심심해서 그랬던가. 이어지는 지명의 특이함에 눈길이 쏠렸다. 신흥리를 필두로 신천리, 신풍리, 신산리, 신양리 하는 식으로 ‘신’자(字)로 시작하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더니 이번에는 신산리를 비롯, 난산리, 수산리, 성산리처럼 가운데에 ‘산’자(字가) 들어가는 지명이 이어져 이들을 외우면서 가다 보니 제법 심심풀이가 되었다.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 성산 근처에 도착했다. 숙박시설이 몰려 있는 일출봉까지 가려면 한 시간 가까이 더 걸어야 되었지만 여기서 조금 욕심을 부려 TV 연속극 ‘올인’ 때문에 유명해진 섭지코지를 둘러보기로 작정했다.

   
  ▲ 드라마 '올인' 덕에 관광객이 늘어 섭지코지로 들어가는 길은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탤런트 이병헌과 송혜교가 열연, 크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올인’. 제작자 측은 한적한 수녀원 배경이 필요해 이곳에 건물을 지어 촬영하는 성의를 보였다. 그 결과 수녀원 건물과 섭지코지의 풍광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浮上)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일직선으로 북상(北上)하는 정상 코스를 벗어나 오른쪽 바다를 향해 한참 나아가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좀 무리를 해서라도 보고 싶었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기 때문이리라.

일주도로에서 우회전, 섭지코지로 가는 길은 새로 단장되고 있었다. 굴삭기까지 동원되어 도로확장 공사가 펼쳐지고 있었으며 길 주변의 미화작업도 진행됐다. 얼마나 관광객이 몰려오면 이럴까? 방송의 위력과 문화상품(드라마)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리는 역시 무리. 날은 금방 어두워졌고 가깝게 생각됐던 길이 의외로 멀었다.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밤에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게 뻔해서 발길을 돌렸다. 일출봉 쪽으로. 
 

최창신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다.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태권도신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