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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를 걷다
최창신 2009년 01월 17일 (토) 03:33:49
걸어서 탐라(耽羅) 일주-후편(6)

빈 들을 보아라 아가야/네 종이배의 항로는/풀뿌리 사이를 물뱀처럼 달려 와/흥정없는 사랑으로/비늘로 빛나고 있다.(허영선 <노을의 끝>에서)

제주도 사람들은 절망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비법을 일출과 일몰에서 배운다고 한다. 그것은 믿음이 되고, 소망이 되고, 자유를 생각하게 만든다고 한다.

탐라의 새벽은 성산포 일출봉이 깨운다. 일출봉 자락에 앉은 'S호텔'. 깨끗하고 조용하여 충분한 휴식과 숙면을 안겨주었다. 바닷가가 지척이다. 왼쪽의 10시 방향에 우도(牛島 )가 글자 그대로 소처럼 누워있고 그 건너편 수평선을 통해 ‘해오름’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소설가 현길언은 그 모습을 이렇게 남기고 있다.
“수평선으로 붉은 기운이 마치 부채살처럼 퍼지면서 불덩이가 피어오르다가 그 기운이 차차 짙어진다. 수평선이 온통 지독한 화염에 휩싸여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붉은 불덩이가 툭 튀어 나온다.
들끓던 수평선이 해산의 고통에 울부짖던 임산부가 막 해산을 마친 뒤에 얻는 그 편안한 얼굴처럼 조용해진다. 화염이 사라지면서 바다는 온통 은빛 수를 놓은 듯이 눈부시다.”

‘흥정없는 사랑’ ‘비늘처럼 빛나는’ 허영선의 노을도, '임산부의 해산‘에 비유된 현길언의 일출도 역시 탐라에서는 맛이 다르다. 마치 농약으로 위장되지 않은 야채,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싱싱한 과일을 맛보는 것 같다.

이렇게 시작한 하루, 당초의 계획에 따라 일주(一周)의 발길을 잠시 멈추고 좀 호사(豪奢)하며 보내기로 한다. 말이 호사지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며 걷기 마니아라면 마땅히 경험해 보아야할 일이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올레의 모습  
‘제주올레의 답사.’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전 코스를 걸어 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탐색전으로 만족할 작정. 그래서 택한 것이 가장 상징적인 제1코스 15킬로미터. 여기에 섭지코지 방문 프로그램까지 더하면 만만치 않은 일정이 될 것이다.

‘제주올레’란 자연을 벗하며 걷기 좋아하는 느림의 미학파들을 위해 제주도 여기저기(주로 바닷가)에 조성된 걷기코스. 원래 있던 건 아니고 지난 1, 2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상당한 배경이 있지만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서명숙씨라고 52세 된 전직 언론인이 있다. 성산 출생으로 서귀포에서 자랐다. 대학 때부터 서울에서 생활, 23년 동안을 기자로 일했다. 그가 2006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스페인의 ‘산티아고 성지순례길’ 8백 킬로미터를 걸었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고향 제주도에 걷기코스를 만든 것. 귀국 후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조직, 스스로 이사장이 되어 많은 노력 끝에 7개 코스 1백2 킬로미터를 조성했고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작정이라 한다.

참고로 ‘올레’는 사람들이 다니는 큰 길과 개인 집을 연결해주는 좁은 출입로. 제주사람들에게 이 ‘올레’는 삶에 여유와 휴식을 마련해 주는 안식의 공간이다.

잠시 허영선 시인에게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가 걷고 싶은 길은/바닷길 곶자왈(자갈이 많은 길) 돌빌레(큰 돌바위들이 있는 길) 구불구불 불편하여도/우리보다 앞서간 사람들이 걷고 걸었던 흙길/ 들바람 갯바람에 그을리며 흔들리며/걷고 걸어도 흙냄새 사람냄새 폴폴 나는 길/그런 길이라네”(후략)

   
  ▲제주올레 제1코스의 출발점을 알리는 팻말이 시흥초등학교 돌담에 붙어 있다.  
제1코스는 성산읍 시흥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시작하여 두산봉(말미오름) 종달리 해안도로 일출봉을 지나 광치기해안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학교 앞 출발점. 학교 운동장도 교실도 주변 마을도 모두 조용하다. 비록 여름은 아니지만 이날따라 날씨가 유난히 좋아 와랑와랑한 햇볕이 하얗게 부서지는 흙길. 밭에는 당근 이파리들이 초여름처럼 초록으로 무성하고. 파아란 하늘 아래 기분좋게 졸고 있는 시흥마을. 그 아름다운 정밀(靜謐)은 나그네의 몸과 마음을 자연의 한 부분인 양 어루만지며 달래주었다.

그래서 시인 허영선도 “그 길 위에 서면 너도 나도 마냥 평화로워지는 길, 그 길 위에 서면 너도 나도 그저 행복해지는 그런 길”이라 했다.

두산봉에 이르는 목장 언덕길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장면처럼 포근했고 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사방의 풍광은 가슴 속까지 후련하게 해주었다. 집집마다 지붕 색깔이 아름답고 동네 전체가 깔끔한 종달리, 생태계가 살아 있는 해안도로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제주올레’, 그것은 틀림없이 오랫동안 추억의 서랍 속에 곱게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흥리와 종달리. 옛날에 목사(牧使)가 새로 부임하면 제주도를 한 바퀴 둘러보게 되는데 출발점이 시흥(始興)리이고 종착점이 종달(終達)리였다 하니 한 마을처럼 보이지만 가장 먼 사이가 될 수도 있었겠다. 거기다 해녀들의 작업장 경계선 때문에 자주 불화와 갈등이 빚어졌다 하거니와 이런 불편한 관계가 ‘제주올레’ 때문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식이어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옥에 티라고나 할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목장구역 내에서 남의 집에 몰래 드나들듯이 닫힌 문을 여닫고 다녀야 되는 어색함이요, 또 하나는 군데군데 진흙탕 웅덩이가 있어 지나가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이다. 앞으로 이런 결함들은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 아무튼 서명숙씨와 법인 관계자들, 그리고 제주도 당국 모든 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최창신
서울신문 기자 출신.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다.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태권도신문사 상임고문, 한국유소년축구회 회장, 프로축구단 서울유나이티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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