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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에서
임철순 2009년 02월 24일 (화) 01:04:05
   

토요일이었던 21일, 덕유산은 전 날 내린 눈이 더해져 설경이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덕유산의 한자 德裕는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母山)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글자라는데, 봄이 오기 전에 몸과 마음에 설경을 담으려는 사람들을 이름 그대로 너그럽게 받아 주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춥지 않은 데다 바람도 없어 산행에 최적인 날이었습니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 탑승-설천봉-향적봉-중봉-오수자굴-백련사-삼공리에 이르는 구간을 친구들과 함께 6시간 가까이 걸었습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과 구상나무는 눈을 안고 이고 지고 업고 낀 채로 서 있었습니다. 누가 한 말인지 잊었지만, ‘나무는 아파도 서서 앓는다’던데, 모든 나무가 저마다 자기 자리에 맞게 최선의 자세로 서서 풍우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눈부신 햇살 아래 상고대와 눈꽃을 두루 살피면서 평평한 지대로 내려왔을 때, 나무에 걸린 팻말이 눈에 띄어 일 삼아 그 이름을 일일이 적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당단풍 쪽동백 노박덩쿨 호랑버들 까치박달 느릅살구 조록싸리 곰의말채 함박꽃나무 대팻집나무 복장나무 개벚나무 개회나무 개옻나무 괴불나무 신갈나무 거제수나무 산뽕나무 서어나무 사스래나무 작살나무 고로쇠나무 쇠물푸레나무 음나무 다름나무 고추나무 졸참나무 야광나무 산딸나무 아그배나무 피나무 비목….

모두가 ‘낙엽 지는 넓은 잎의 큰 키(또는 작은 키)나무’입니다. 낙엽 지는, 낙엽 지는….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신한은행이 공동 제작해 걸어 놓은 팻말은 모두 이런 형식으로 돼 있었습니다. 제작의 편의와 일관성을 위해 똑 같게 한 것이겠지만, 나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낙엽이 지느냐 안 지느냐 그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다른 생각도 했습니다. ‘낙엽 지는 넓은 잎의 큰 키 나무’라는 말은 그와 반대로 이 세상에는 ‘낙엽이 지지 않는 좁은 잎의 작은 키 나무’가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또 ‘낙엽 지는 좁은 잎의 작은 키 나무’도 있고 ‘낙엽 지는 좁은 잎의 큰 키 나무’도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백련사 가까이 내려갔을 때 ‘늘 푸른 바늘잎의 큰 키 나무’ 전나무와 잣나무의 팻말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임철순’이지만, 이 세상에는 임철순 아닌 사람들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나무에 관한 설명 중 ‘5월에 꽃이 피고…’라는 말은 5월에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이 더 많다는 뜻입니다.

   

이름은 저마다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물에는 저마다 알맞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 날 친구 중 한 명이 곤돌라(gondola)를 자꾸 콘돌라라고 하기에 “G와 C는 다르잖아. 기타를 키타라고 할 수 있어? 콘돔보고 곤돔이라고 하면 콘돔이 좋아하겠니?”하고 헛소리를 했지만, 그 숱한 나무들은 낙엽이 지는 점에서는 같지만 이름은 어디까지나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의 향기가 있는 쉼터’라는 곳에 이르니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이해인의 <산을 보며>라는 시가 나뭇잎 모양의 판에 씌어져 걸려 있었습니다. 높이 3m에 가까운 큰 바위도 있었습니다. 분명 다른 곳에서 옮겨와 심은 것으로 보이는 바위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바위에 마음대로 뭔가 새기라고 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무엇이든 남기고 싶어하고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싶어합니다. 일부러 아무 말도 새기지 않은 무자비(無字碑)나 백비(白碑)도 있지만, 사람은 흰 벽면이나 판판한 돌을 보면 무엇이든 새기거나 그리고 싶어지고 말을 남기고 싶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솔 이효상(李孝祥ㆍ1906~1989)은 1969년에 3선개헌안을 통과시킨 국회의장이라는 오명을 얻었지만, 원래는 시인이며 교육자였습니다. 그의 시에 <가슴이 바위인가>라는 좋은 작품이 있습니다. ‘내 가슴이 바위인가/오는 사람마다 무엇을 새겨 놓고 간다/오늘같이 가을 바람이 우수수 불면/새겨진 글자가 똑똑히 드러난다/나는 내 가슴이 바위같이 무거운데/눈물을 흘려 씻어도 글자가 지질 아니한다.’

이 작품보다는 못하지만 <바위>라는 그의 시도 함께 읽어 봅니다. ‘아무데 있어도 좋습니다/아무렇게 생겼어도 좋습니다//그 부동하는 태세 안에/은근히 관대한 함축성//아무데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아무 때라도 온화한 표정입니다//사(邪)도 없고 하나의 현재/극히 믿음직한 무언의 신념//나 설레는 가슴을 달래어/때때로 바위와 같이 앉아 봅니다.’

돌에 자기 이름을 새긴 사람들, 나무와 풀의 이름을 짓고 매겨 준 사람들이 끝내 부럽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사물이나 일, 자연이나 인간관계의 현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이론과 틀을 세워 만들어 남기고 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훨씬 더 많습니다. 실은 우리들 대부분이 다 그렇습니다. ‘낙엽 지는 넓은 잎의 큰 키 나무’라고 말할 때 ‘낙엽이 지지 않는 좁은 잎의 키 작은 나무’를 함께 생각하라는 것이 덕과 여유, 이름도 의미가 있는 덕유산의 메시지인 것 같았습니다.

그 산의 작은 공간에 매어 달려 있던 이해인의 시 <산을 보며>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늘 그렇게/고요하고 든든한/푸른 힘으로 나를 지켜 주십시오//기쁠 때나 슬플 때/나의 삶이 메마르고/참을성이 부족할 때/오해 받은 일이 억울하여/누구를 용서할 수 없을 때//나는 창을 열고 당신에게 도움을 청합니다//이름만 불러도 희망이 되고/바라만 보아도 위로가 되는 산/그 푸른 침묵 속에/기도로 열리는 오늘입니다//다시 사랑할 힘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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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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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인 (211.XXX.XXX.129)
임주필이 요렇게 글을 잘써부려야^^^^^^
안녕하신가 영국 웨일즈의 명인일쎄. 모두가 그립구만 여긴 수선화가 이미 피기 시작했네 오늘도 공원엘 갔다 왔는데 이름 모를 꽃들이 막 필려고 하더군. 근데 원예학과를 나온 난
딱 수선화 하나만 알겠더구만... 자네 이메일 보고 내 졸업장을 반납해야겠다고 생각되네.
벌써 글이 막히네 뭘써야 할지. 안녕.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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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6 09: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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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on O'Brien (211.XXX.XXX.129)
덕유산 갔다오시고 쓰신 글 받아 보고 깊게 감동받으며 읽었읍니다. 어떻게 그리 섬세한 맘을 갖으셨는지요. 꽃과 나무, 그리고 자연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저는 선생님의 글 소재가 좋았고 그걸 통해 느끼신 우리네 삶 속의 태도의 관찰 또한 생각을 넓혀주어 아주 뜻이 있었읍니다. 또 좋은글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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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1:2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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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분순 (211.XXX.XXX.129)
봄바람 부드러운 봄날 오후, 외출에서 돌아와 임주필님 글을 보며 빙긋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덕유산 저도 간 적 있지요. 산 위가 아니라 휴양림에서 하룻밤 지내고 왔거든요.
그 산을 오르며 느낀 시감상 곁들인 글이 묘한 감동을 몰고 오는군요. 계속 반가운 글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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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1: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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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완 (211.XXX.XXX.129)
임주필 일행의 덕유산 산행을 제가 멀리서 지켜봤지요. 그 날 동아일보 후배 5명과 함께 역시 눈이 쌓인 김천 황악산 정상에 올랐거든요. 멀리 흰 눈이 깔린 덕유산슬로프를 보면서 "저기 덕유산 보이네. 눈이 많이 왔는데.."하고 우리끼리 한마디씩 토해냈어요.
우리 일행 10명(직지사에서 시간을 보낸 가족 4명 포함)은 하산후 목욕을 마치고 훈제 삼겹살집으로 옮겨 하산주와 저녁을 실컷 즐긴 뒤 밤11시가 넘어서야 귀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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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4 11: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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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211.XXX.XXX.129)
정겹고 고적한 산의 향기에 흠뻑 젖고 갑니다. 저는 오랜만에 봄 잔디 속으로 갑니다(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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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4 11: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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